세종이 신뢰한 하경복(河敬復) - ①

2022.06.09 10:39:24

[‘세종의 길’ 함께 걷기 94]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이번 하경복(1377~1438)을 통해 세종의 마음을 읽는 경우다. 곧 상대가 절실히 걱정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는 세종을 만나게 된다. 하경복과 그 형제들이 걱정하는 바[마음]를 세종은 평소에 함께 나눈 것이다.

 

하경복의 본관은 진주이며, 임오년 태종 2년 1402에 무거(武擧) 급제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겨 상호군(上護軍)에 이르고, 경인년 태종 10년(1410)에 다시 중시무거(重試武擧, 10년에 한 번 보던 무과 과거시험)에 합격 첨총제(僉摠制, 무과 정3품 벼슬)에 발탁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경원진(慶源鎭)으로 나갔다. 태종 14년(1414)에 동지총제로 승진,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로 나갔다.

 

초기

 

하경복은 천성이 호탕한데 태종 10년 길주로 발령이 난다. 그동안은 한양에서 잘 지내고 있다가 4군 6진이 있는 한반도 최북단이며, 최전방 동북면에 발령이 난 것이다. 하지만 길주 발령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하경복의 최일선 인생이 시작되는데, 길주로 갔다가 경원으로 갔다가 한반도 맨 위 경성으로 발령이 난다. 그러다 아예 함길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된다. 최전방 두메 전역을 돌다 1년 만에 그 지역 전체를 관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바로 그해 여진족이 대규모로 침공해 경원진 지역이 침공받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조선군은 사상자도 대규모로 발생하고 민간인들도 납치당하는 약탈전에 일시적으로 경원 지역 조선군들이 전부 남쪽으로 밀려나 버리고 지역 전체가 황폐해지는 상황이 벌어져 진이고 다 철수하는 판국에 병마절제사인 하경복만 남게 된다.

 

이후 동북면 최전방 지역은 조선군과 여진족이 끊임없이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하경복은 태종대 내내 일만 생기면 북방으로 달려가게 된다.

 

세종조의 하경복

 

∙세종 즉위년 8월 12일 : 동지 총제 하경복을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로 삼았다. 8월 27일에는 우군 총제가 되었다.

 

∙즉위년 11월 19일 : 연사종(延嗣宗)ㆍ하경복 등이 상왕에게 아뢰기를, "길주(吉州)는 한 도의 중앙에 있어서 방어가 심히 긴요하며, 창고가 다신산성(多信山城)에 있는데, 새로 쌓은 읍성(邑城)은 뒤에 있으니, 마땅히 산성 앞의 부세리(夫世里)에 읍성을 쌓아 거처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말대로 좇았다.

 

∙세종 1년 7월 4일 : 동지총제 하경복에게 밭 20결을 하사하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 1년 11월 6일, 한삼난사 유래 : (북쪽에서 사냥하고, 날씨가 추워 서울로 돌아가기로 하다) 하경복ㆍ연사종이 아뢰기를, "서울에 돌아가는 것이 매우 편합니다." 하였으나, 홀로 이명덕이 아뢰기를, "충청도 몰이꾼이 벌써 방림(芳林)에 도착하였고, 또 추위와 따뜻함이 서로 이어 오는지라, 오래지 않아서 따뜻할 것이니, 강릉으로 향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속담에 한삼난사(寒三暖四)라 하니...

 

이 인용을 보면 요즘 말하는 겨울철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이때는 ‘한삼난사’라 불리고 있었다.

 

∙ 세종 1년 12월 17일, 세종과 술자리 : 상왕이 내전에서 도진무(都鎭撫) 연사종ㆍ최윤덕ㆍ하경복(河敬復)ㆍ이춘생과 병조 판서 조말생ㆍ참판 이명덕ㆍ참의 윤회ㆍ겸 지사 전직 등을 인견하여 군무(軍務)를 처결하고, 이어 술자리를 차렸다.

 

∙세종 2년 3월 6일 : 낮참에 포천현 송원 남쪽들에 머물러 술을 베풀다.

 

∙세종 2년 4월 7일 : 부평부 목금제 안의 좋은 땅을 하경복 등에게 주었다.

 

∙ 첫 죄와 용서, 세종 3년 2월 26일 : 3품 이상 관원이 관청에 드는 날에 공비전(恭妃殿)에 문안하는 것이 전례이다. 병조에서 좌군 절제사김만수(金萬壽)와 도진무(都鎭撫) 하경복이 작은 실수가 있어 군법에 위반되었으므로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세종 3년 5월 7일에는 상왕이 포천에서 사냥할 때 하경복 등 13인이 호위하며 뒤따랐다.

 

북방 방비의 책임자

 

∙ 세종 4년 5월 10일 :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 4년 윤12월 26일 하경복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보낸다. 이후 여진족과의 교류며 관리를 맡게 된다.

 

∙ 세종 5년 12월 11일 : 하경복으로 우군 도총제를 삼는다.

 

∙ 세종 6년 9월 25일 : 9월 15일에 겸진올적합이 노략질하니 병마도절제사 하경복이 이를 물리치다.

 

∙ 세종 6년 11월 2일 :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의 어미에게 비단 각 한 필과 쌀을 내려주다.

 

임금이 이르기를,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 나라를 위하여 변방에 진을 치고, 근일에 승전한 공로가 있는데, 그 어미가 멀리 경상도 진주에 있고 또 집이 가난하니,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는 그 생각이 어떠하랴. 임금으로 신하를 부리는데 그들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고, 곧 그 어미에게 비단 각 1필과 쌀 30석을 내리었다.

 

이때 이 일에 감읍하여 하경복 형제는 세종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이 내용은 다음 연재에서 다루기로 한다. 세종이 6년 11월 29일에 편지를 보내고 이어 하경복, 동생 하경리가 답신을 보낸다.)

 

 

북방 진무

 

∙세종 9년(1427) :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고, 경술년 세종 12(1430) 에 판좌군도총제부사로 승진되었으며, 또 그대로 절제사를 겸임하게 하였고, 임자년 세종 14년(1432)에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북방을 진무하기를 무릇 15년 동안 하였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여 사졸들이 즐겨 그의 쓰임을 받았고, 야인들도 두려워하고 또 사랑해 받들었는데, 진실로 의(義)가 아니면 비록 터럭 끝만 한 것일지라도 절대 취하지 않아서, 야인들이 더욱 그 청백함에 탄복하였으며, 나라에서 그에 두텁게 신임하였다.

 

∙세종 17년(1435) : 내직으로 들어와 의정부 찬성이 되었다가 곧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고, 병진년 세종 18년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더니 얼마 안 되어 다시 불리어 세종 18년 12월 27일 경상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 세종 18년 1월 15일 : 일찍이 듣건대, 함길도의 회령ㆍ종성 등지의 인민은 지난 을묘년의 기근이 있고 난 뒤에 돌림병을 얻어 죽은 사람이 매우 많다 하므로, 드디어 도순무사 심도원(沈道源)에게 죽은 사람의 수효를 캐물었더니 9백여 인이나 되었다. 지금 찬성사 하경복이 그 지경에 가서 나에게 알리기를,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이 반이 넘습니다.’ 하니, 내가 생각하기는 그 지경에 인민이 본디 8만여 명인데, 만약 반이 넘게 죽었다면 4만여 명이 넘을 것이다. 경복의 말이 비록 다 참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또한 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 본도의 도절제사 김종서와 도관찰사 정흠지가 친히 아뢰기를 도관찰사 정흠지가 친히 아뢰기를, ‘돌림병을 앓아 죽은 사람의 수효가 그다지 많은 데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참으로 아는 것이겠는가. 이에 세종은 “ 내가 사람을 보내어 꾸짖어 캐물어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수효를 알고자 한다." 하였다.

 

하경복에 대한 신뢰

 

∙ 세종 18년 5월 9일 : 함길도 경차관(敬差官) 조수량(趙遂良)이 아뢰기를, "새로 설치한 4진(鎭)의 인민으로서 죽은 자가 3천 2백여 명입니다." 하니, 임금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하경복이 전날에 아뢴 것이 거짓이라고 하여 그 벼슬을 파면시켰다.

 

그러나 이후 세종은 하경복의 죄를 용서했다. 직접 사람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닌 보고의 실수로 보았다.

 

∙ 세종 18년 5월 13일 : 하경복 등에게 벌을 줄 것을 윤허하지 않았다.

 

∙ 세종 18년 5월 24일 : 하경복에게 명하여 돌아가 그 모친을 봉양하게 하다.

 

∙ 세종1 8년 12월 27일 : 박종우를 경상좌도 절제사로, 하경복을 우도 절제사로 임명하다.

 

세종 18년 5월부터 12월 사이의 일만 보아도 비록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이를 용서하고 하경복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다.

 

∙ 세종 20년 8월 17일 : 경상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죽었다. 62살이었다.

 

최일선에서 고생하는 하경복에 대한 세종의 마음 쓰기를 읽을 수 있다.

 

하경복이 졸하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고, 조정에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관에서 그 장사를 돌봐 주었다. 천성이 너그럽고, 용모와 몸가짐이 아름다웠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다.

 

그는 관리로서 소박하게 살려는 마음을 다진 바 있다. 그가 함길도에 있을 당시에 부인 정(鄭) 씨가 그의 녹봉을 밑천으로 하여 저택을 세우니, 경복이 돌아와서 못마땅하게 여겨 말하기를, "나는 평생토록 초가집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집을 이렇게 장대하게 세운단 말인가." 하고, 곧 그 철거를 명하였는데, 그의 아들과 사위와 이웃들이 모두 헐지 말라고 간청한 뒤에야 비로소 중지한 바 있다. 이것으로써 대략 그의 마음 세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한(漢)이었다.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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