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터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국보로

  • 등록 2022.12.27 11: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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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 선서문」, 《사시찬요》, 「손소 적개공신교서」 등 6점 보물 지정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백제시대 공예품의 정수(精髓)라고 알려진 보물 「익산 미륵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를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하고, 「대방광불화엄경소 권88」, 「손소 적개공신교서」, 「이봉창 의사 선서문」 등 고려․조선 시대 전적, 근대 등록문화재 6건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였다.

 

국보 「익산 미륵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는 2009년 익산 미륵사터 서탑 심주석(心柱石, 탑 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기둥)의 사리공(舍利孔, 불탑 안에 사리를 넣을 크기로 뚫은 구멍)에서 나온 유물로서, 639년(백제 무왕 40년)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 사리봉영기(金製 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사리외호(金銅舍利外壺)와 금제 사리내호(金製 舍利內壺),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았던 청동합(靑銅合)을 포함해 모두 9점이다.

*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供養物) 등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 데 필요한 기구(器具)를 빠짐없이 갖추어 둔 것이라는 뜻에서 ‘사리갖춤’이라고도 함

 

 

 

사리장엄구 가운데 금제 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ㆍ뒷면에 각각 11줄 모두 193자를 새겼으며,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절을 세우고 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에 대한 기원을 담았다.

 

그동안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힌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사리장엄구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되는 유물이다. 서체 역시 곡선미와 우아함이 살아있는 백제서예의 경향과 함께 절대 연도가 있는 유물이 부족한 삼국시대 서예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사리장엄구 가운데 금동사리외호와 금제 사리내호는 모두 몸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 동아시아 사리기 가운데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독창적인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몸체의 알맞은 비례와 유려하고 생동감이 뛰어난 무늬 등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사리장엄구 가운데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가운데 하나에는‘달솔(達率) 목근(目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달솔이라는 벼슬(2품)을 한 목근이라는 인물이 시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글씨를 바탕으로 시주자의 신분이 백제 상류층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값어치와 함께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 확인되어 희귀성이 높다. 녹로(轆轤)로 형태를 만든 동제 그릇으로, 일부는 우리나라 유기(鍮器) 제작 역사의 기원을 밝혀 줄 중요한 사례다.

*녹로(轆轤): 그릇을 만들거나 무늬를 넣을 때 사용하는 돌림판

 

이처럼 국보 「익산 미륵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 모습 그대로 발굴되어 출토지가 명확하고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를 위한 절대적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와 백제 금속공예 기술의 역량을 응집해 탁월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으므로 한국공예사에 있어 위상이 높다. 7세기 전반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한편 동아시아 사리공예품의 대외교류를 밝혀주는 자료로써 역사ㆍ학술ㆍ예술적 값어치가 매우 크다.

 

한편, 보물로 지정된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66(初雕本 瑜伽師地論 卷六十六)》과 《대방광불화엄경소 권88(大方廣佛華嚴經疏 卷八十八)》 모두 고려 11세기에서 12세기 동안 만들어진 불교경전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보물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66》은 모두 100권으로 구성된 《유가사지론》 가운데 권66에 해당하는 고려 11세기에 펴낸 자료로, 해당 권차는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는 유일본이다. 고려시대에 한문을 우리말로 뒤쳐(번역해) 읽을 수 있도록 치밀하게 토를 단 석독구결(釋讀口訣,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을 수 있도록 문장 사이에 단 구결)이 표시되어 있어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 이 구결을 통해 고려시대 유식학(唯識學)에 대한 연구 수준을 엿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교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중국 당나라 때 현장(玄奘)이 한문으로 뒤친 것으로 모두 1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미륵보살이 4달 동안 날마다 설법한 내용을 수록. 유가(瑜伽)를 행하는 사람의 수행 단계와 유식학과 관련된 용어를 풀이하였으며,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을 이룬 경전

 

*유식학(唯識學): 중국 당나라 현장이 뒤친 법상종(法相宗)의 중요한 경전으로, 자아(自我)에 대해 해명하는 불교철학의 학파

 

같이 보물로 지정된 《대방광불화엄경소 권88》은 모두 120권으로 이루어진 《대방광불화엄경소》의 권88에 해당하는 자료로, 1087년(고려 선종 4) 우리나라에 목판이 전래하면서 국내에서 펴내기 시작했다. 이후 1424년(세종 6)에 일본이 여러 차례 대장경판을 요구할 때 다른 경판들과 함께 일본에 하사했으므로, 그 이후에 찍은 간행본은 국내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본이다. 이 자료는 판본과 인쇄상태로 보아 12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며, 동일판본 가운데 유일하게 알려진 권차이다.

*《대방광불화엄경》: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묘법연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경전으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 중심사상. 크고 방정하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꽃같이 장엄한 경전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깨달음을 그대로 표명한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또한 보존상태가 우수하고 조선ㆍ중국ㆍ일본 삼국의 불교교류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보존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종로도서관 소장 보물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14책도 보물로 새롭게 지정됐다. 원나라 승려 염상(念常, 1282~?)이 석가모니의 탄생부터 1334년까지 고승들의 전기(傳記)나 일화들을 시간순으로 엮은 책으로, 1430년(명 선덕 5) 다시 펴낸 판본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새긴 목판을 1472년(성종 3년) 인수대비(仁粹大妃, 1437~1504)의 발원으로 찍은 것이다. 성종(成宗)의 모친이자 인수대비가 임금과 왕자, 공주 등 왕실의 안녕과 장수를 위해 발원하고 펴낸 것으로, 전체 권차가 남아 있는 완질본일 뿐 아니라 현재까지 국내에서 두 건만 확인되어 자료적인 완전성과 함께 희소성 또한 높다.

*동일한 판본의 다른 한 건은 1982년 11월 보물로 지정되었음

 

 

 

보물 《사시찬요(四時纂要)》는 중국 당나라 말기인 996년에 한악(韓鄂)이 펴낸 농업책으로,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을 12달로 나누고 월별의 농법과 금기 사항, 가축 사육법 등을 수록해 놓은 책이다. 조선 초기 농정(農政)과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들여와 세종 때 《농사직설(農事直設)》이 편찬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농업경영에 참고한 대표적인 관련 서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대상은 조선 전기까지 사용한 고려 서적원(書籍院) 제작 활자를 바탕으로 조선 초에 사용한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 중자(中字)를 함께 사용하여 찍은 책이다. 《사시찬요》 가운데 지금까지 한ㆍ중ㆍ일 삼국에서 공개된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서지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학술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간행 시기는 계미 중자의 사용례로 보아, 1403년부터 1420년 사이에 해당하는 조선 전기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를 사용해 《사시찬요》를 찍게 된 배경에는 단지 농업 활동의 증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극복이라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 책은 민생을 위한 농업의 증진,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사실 뿐 아니라 간행 당시의 사회경제사의 배경까지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보물 「손소 적개공신교서(孫昭 敵愾功臣敎書)」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마을에 대대로 거주해 온 경주손씨(慶州孫氏)의 후손 손소(孫昭, 1433~1484)가 하사받은 적개공신교서 1점이다. 적개공신은 1467년(세조 13)에 세조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로 모두 45명을 녹훈(錄勳)하였으며, 1등은 이준(李浚) 등 10명, 2등은 김국광(金國光) 등 23명, 3등은 이부(李溥) 등 12명이다. 이 가운데 2등 공신 장말손(張末孫), 3등 공신 정종(鄭種)의 교서가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시애의 난: 1467년 세조의 집권정책에 반대해 무신 이시애가 주동하여 함경북도 길주에 일어난 반란

*녹훈: 훈공을 장부나 문서에 기록함

 

 

손소는 1467년 5월 이시애의 난 때 군사업무를 담당하고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훈(策勳)되고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되었다.

*책훈(策勳): 공(功)을 새운 사람의 이름과 공훈(功勳)을 문서에 기록함

*내섬시정: 조선시대 각 궁에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는 관청인 내섬시(內贍寺)에 소속된 정3품의 관직

 

해당 교서에는 수급자명, 공적내용, 특전과 포상, 등위별 공신명단 그리고 발급일자가 기록되었고 마지막 발급일자 위에 「시명(施命)」이라는 어보를 찍었다.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16세기 관련 의궤에 수록된 교서의 재질과 장황(粧䌙, 표구는 일본식 말) 형식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새롭게 꾸미거나 후대의 보수 없이 550년 넘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손소 적개공신교서」는 조선 전기 중요 사건 가운데 하나인 이시애의 난과 그에 대한 나라의 조치, 공신으로 책훈된 인물, 공신에 대한 각종 은전과 특전에 관한 구체적 사례 등에 관한 역사적 내용을 제공하고 있어 조선시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아울러 공신교서 문서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고, 현전하는 적개공신교서나 관련문서들과 견줄 때 보존상태가 가장 우수한 자료로 판단된다.

 

보물 「이봉창 의사 선서문(李奉昌 義士 宣誓文)」은 1931년 12월 13일에 작성된 것으로, 이봉창 의사(1900~1932)가 일본에 대한 항쟁을 다짐한 국한문혼용 선서문이다. 이 선서문은 김구(金九)가 결성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제출된 것이다. 이날 서명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이자 한인애국단 임원이었던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가슴에 단 채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이때 찍은 흑백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 선서문의 내용: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

     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

     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십삼년십이월십삼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앞

 

 

*이봉창 의사 의거: 일명 ‘동경의거’로 알려진 사건으로, 1932년 1월 8일 도쿄의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던 히로히토[裕仁]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의거를 말함. 이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음. 이 사건은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끼쳐 일제가 중국의 항일운동을 무력으로 억압하고자 1932년에 일으킨 제1차 ‘상해사변’을 촉발했고, 이어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가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한인애국단: 김구 주도로 결성된 항일무력단체로, 한ㆍ중 우의와 일본수뇌 암살 목적으로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되었음. 이봉창 의사는 윤봉길 의사와 함께 이 단체의 단원으로 활동하였음

 

「이봉창 의사 선서문」은 1931년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선서한 당시 작성된 것으로, 이 의사의 의거 행적과 한인애국단의 활동, 항일투쟁의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역사적 산물이다. 이듬해 훙커우공원에서 의거를 단행한 윤봉길 의사가 작성한 선서문(1972.8.16. 보물 지정)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유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한성훈 기자 sol119@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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