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성창순(1934-2017년)은 광주 성원목 명창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남다른 재기를 보여 아버지는 딸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성창순은 각종 경연대회나 문화예술계 수상경력이 화려했고, 뒤에는 판소리<심청가>의 예능보유자에 올랐다는 이야기와 어린 어연경을 판소리 전수자로 받아들여 단가와 판소리를 지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성창순 명창은 안타깝게도 2003년, 그의 나이 69살에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제자들과 약속된 수업 시간이라든가, 수업 시수는 엄격하게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알려졌다.
어연경 역시, 40일 된 큰딸, 지원이를 데리고, 구기동에 있는 성창순 명창 댁으로 날마다 출근했다고 하는데, 도착해서는 <심청가>와 <춘향가>, <흥보가>를 반복해서 배우고 닦았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도움과 사랑을 듬뿍 쏟아주셨던 선생님이어서 제자들 모두는 늘 마음을 다해 받들고 있는 고마운 선생님으로 남아계시지요.”
성창순 명창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어연경에게 물었다.
하나, 선생의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선생과 작별한 지 7년이 지났다. 지금도 그 번호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340110-2024811>이라고 마치, 자기 주민번호를 외우듯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이 아니라, 잊히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고 적절한 표현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선생을 모시고 이곳, 저곳의 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어느 곳이든, 우선 필요한 서류 제출이나 확인에 주민번호 기재 항목은 반드시 포함되기에 아예 머릿속에 넣고 다녔다는 얘기다. 그가 스승의 주민번호를 아직도 정확하게 외우고 있는 배경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한다.
둘.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 제자들과의 소리 공부는 어떻게 하나?
“성창순 선생님은 말이죠, 병원 문을 나서면서 곧장 댁으로 돌아와, 또다시 제자들과 함께 소리공부를 시작하시곤 했어요. 편히 쉬시라고 말씀을 드리면 역정을 내시곤 했지요. 그렇다고 안 올 수도, 선생님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올 수도 없어서 난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제자들에게 한 대목이라도 더 지도해 주시려 했던 선생님의 그 열정은 모든 제자들이 잊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 분 안 계실 거예요.”
셋. 대학을 실패한 뒤, 늦게 편입학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모 국악경연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어요. 담당자가 어느 학교 출신인가를 물어서 00 00대 재학생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런 대학이 어디 있느냐고 처음 들어본다는 거예요. 지방대학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어서 저로서는 기분도 좋지 않았고, 그 표정에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대학 공부를 쉬고 있던 저로서는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넷. 2011년 <공주 박동진판소리대회>에서 잘 부르고도 대통령상을 놓쳤다는 말이 있는데?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예선 때 모두 12명이 경연에 나왔어요, 그런데 저를 빼고 출전자 모두가 조금씩 가사를 틀렸어요. 그래서 본선에서 제가 틀리지만 않고 무난하게 마친다면 대통령상은 맡아 놓은 것이었지요. 그렇게 자신했던 대목에서 아니리(소리가 아니라 말로 설명하는 대목)를 살짝 버벅거린 거예요. 다른 심사위원들은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대통령상이 확정되는 듯했지만, 위원장이었던 성창순 선생님은 이렇게 받지 말고 명예롭게 받으라고 하셔서 그해에는 대통령상 없이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지요. 그 뒤 보성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모두 10회 정도, 여러 대회에 도전했다가 2018년 10월, 제21회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날은 마침, 성창순 선생님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날이었어요. 아마도 하늘에 계신 선생님이 도와주셨기에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