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비례의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

  • 등록 2024.01.21 11: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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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758년 아름다운 비례를 지닌 쌍탑이 김천 갈항사(葛項寺)의 경내에 세워졌습니다. 발원자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어머니인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와 그녀의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간절한 염원을 담아 탑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탑을 세우 뒤 27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오부인은 황태후가 되었고 그 이후 발원자였던 세 사람은 탑에 기록되었습니다.

 

 

석가탑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비례미

 

신라의 삼국통일은 석탑의 모습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기존 신라와 백제로 대표되던 각기 다른 양식의 석탑이 하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7세기 말 무렵, 경주의 감은사(感恩寺)와 고선사(高仙寺)에 세워진 삼층석탑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탑들은 마치 통일 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는 듯, 안정적이면서도 압도하는 웅장함이 돋보입니다. 초층 탑신석 상단 중앙까지는 밑변이 긴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더하였고 층간의 높이와 지붕의 비례를 일정하게 체감시켜서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초기 석탑의 안정감과 웅장함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비례의 경향이 가늘고 긴 모양으로 바뀌게 됩니다. 탑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돌들을 결합하고 쌓는 방식도 규칙화ㆍ효율화되었으며, 밑변이 길었던 삼각형 구도 역시 밑변이 점차 좁아지는 구도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 하부의 정삼각형 구도와 절묘한 체감율이 적용된 신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석탑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비례를 가진 석탑들은 경주를 비롯하여 지방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이 없어진 부분이 있음에도 석가탑에 버금가는 비례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8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그 비례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탑 표면의 수많은 못 구멍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석가탑이나 그보다 이전 시기에 제작된 일반형 석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탑 표면 전체에서 못 구멍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일반형 석탑이 출현한 7세기 말에서 비례적 완성이 이루어진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석탑의 표면에 못 구멍을 뚫는 경우는 옥개석 모서리에 풍경을 달 때를 빼고는 쓰이지 않는 기법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고선사터 삼층석탑의 초층 탑신석에서 이러한 모습이 처음 나타났으나 유행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존하는 예가 남아 있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금동판 등을 탑에 부착하기 위해 뚫은 못 구멍이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갈항사에 세워졌던 두 탑에는 무슨 이유로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이와 같은 기법이 그것도 지방에서 샛별처럼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의 기단부 부재 배열 방식 및 각 부재 간의 비례 등을 분석해 보면, 758년에 세웠다는 명문 기록을 신뢰할 수 있어서 이 못 구멍에 대한 문제는 기존과는 다른 측면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합니다.

 

경주에서는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빼면 비슷한 못 구멍 표현을 보이는 예가 유일하게 1건 확인됩니다. 경주 반월성 가까이 있는 인용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의 동ㆍ서 삼층석탑이 그것입니다. 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쌍탑은 무너진 채로 오랜 시간이 흘러 부재들의 많이 없어진 편이지만 옥개석과 초층 탑신석에 뚫려 있는 못 구멍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옥개석의 못 구멍은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의 그것과 배열의 차이는 있으나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뚫은 점은 같은 장엄한 뜻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용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의 동ㆍ서 삼층석탑은 표면 장엄의 발전 단계라는 측면으로 접근해 볼 때,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 사이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중간 단계의 유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과 인용사터 전해지는 곳의 동ㆍ서 삼층석탑의 제작 시기는 위의 현상과는 상반됩니다. 이 문제는 명문이 새겨진 시점과 그 배경에 관심을 가지게끔 해줍니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두 탑은 천보(天寶) 17년(758)년 오라비와 언니, 여동생 삼인의 업으로 완성하였다. 오라비는 경주 영묘사의 언적법사고 언니는 소문황태후며, 여동생은 경신태왕의 이모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 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 妹者敬信太王妳在也”)

 

경신태왕(敬信太王)과 소문황태후(昭文皇太后)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인물로서 원성왕(元聖王)과 그의 어머니를 각각 가리킵니다. 이 명문이 중요한 까닭은 그를 임금이라고 기록한 점, 시호(諡號)를 사용하지 않고 경신(敬信)이란 휘(諱, 생전의 이름)를 쓴 점 등을 보아 원성왕의 치세기인 785년에서 798년 사이에 새겨진 것임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건립 당시가 아닌 원성왕의 재위기간 중 임금과의 관계까지 언급하면서 발원자들을 탑에 새긴 것일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경신(敬信)이 임금이 된 뒤 그의 외척들은 그들의 원찰이었던 갈항사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추가 불사(佛事)를 진행한 것 같습니다. 불사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탑에 보이는 못 구멍과 명문이 그러한 숨겨진 사정을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의 독특한 특징이었던 못 구멍들은 건립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성왕의 재위기간 중 표면 장엄을 위해 새롭게 뚫은 것이고, 그러한 장엄 기법은 신라 왕성 바로 인근에 세워져 있었던 인용사터로 전해지는 곳의 동ㆍ서 삼층석탑을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해석해 본다면 지금까지 양식사적으로 의문시되어 왔던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초층 탑신석 중앙의 거친 면 처리 흔적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초층 탑신석의 가운데 면 처리가 거칠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이러한 흔적들은 노출되지 않는 부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써 초층 탑신석 중앙부를 이처럼 처리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찍이 한국 초대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원래는 사천왕상 또는 보살상과 같은 부조상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 이래 다른 의견이 없을 정도로 그러한 흔적이 뚜렷합니다. 이 흔적들은 앞서 살펴본 못 구멍과 함께 이 탑을 이해하는 데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의 하나입니다. 그 까닭은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이 건립될 당시에는 초층 탑신석에 부조상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과 이후 부조상이 없어지면서 이 부위가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동시에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성왕 재위기간 중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이 추가 장엄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부조상은 없어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 이미 계획된 금동판 등이 부착되면서 더 이상 깔끔히 다듬어야 할 까닭이 없었던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층 탑신석 중앙부의 거친 면

처리 흔적들은 석탑의 표면에 못 구멍이 뚫린 시기가 원성왕의 치세기일 것이라는 추정을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의문을 간직하고 있는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

 

갈항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은 아름다운 비례미와 758년이라는 절대연대가 남아 있어 ᄔᅡᆷ북국시대 석탑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유물입니다. 짧지만 단서를 내포하고 있는 명문을 비롯하여 이들 탑만이 지닌 독특한 특징들은 당시 신라인들의 생각과 배경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내용들을 제외하더라도 이들 두 탑에는 여전히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습니다. 같은 모습의 두 탑을 만들면서 비슷한 듯 다른 부분들이 유독 많고 출토된 사리장엄구와 그 속에서 나온 <준제진언(법구경)>, 그리고 사리장엄구의 출토 위치 등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도 맞추어 나가야 할 수수께끼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비슷한 듯 다른 양상들은 그 까닭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합니다. 과연 무슨 이유로 그렇게 처리한 것일까요? 계획된 의장일까요? 아니면 단순한 실수 정도로 치부해야 할까요?

 

                                                                                  국립중앙박물관(임재완) 제공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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