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일러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세 가지 가르침(三敎)을 품고서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 857~?)이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에서 풍류라는 현묘한 도가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 있었다는 것인데, 이 풍류라는 것은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하고 밖에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고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살며, 악을 만들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이른바 공자와 노자와 석가모니 세 성인의 가르침을 다 담아서 참된 삶을 사는 것을 풍류라고 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마디로 풍류라는 말은 우리 조상들이 생각하는 최상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고달픈 현실 생활 속에서도 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아갈 줄 아는 삶의 지혜와 멋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일상에서 가무(歌舞)를 즐기고 철 따라 물 좋고 산 좋은 경관(景觀)을 찾아 노닐면서 자연과 기상(氣象)을 키워나가는 생활로 이어졌다. 신라의 화랑도(花郞道)정신이 바로 이러한 풍류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기에 화랑도를 바로 풍류도(風流道)라 하기도 하고 그 사상을 일러 풍류사상이라 한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이러한 우리의 정서를 그대로 전승하면서 삶의 지혜나 활력을 갖게 하는 것이 마음의 풍류고, 이러한 마음의 풍류는 악기를 통해, 입으로 내는 노래를 통해 음악에서의 풍류로 탄생한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들이 이러한 흥과 아취를 즐기기 위해 시와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류음악을 만들어 발전시켰다.
곧 가야금, 거문고, 아쟁, 장구와 같은 악기를 사용하여 시조, 가사, 판소리와 같은 가사에 맞춰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런 음악은 요란스럽거나 어지럽지 않고 인격의 완성, 만물과의 조화로움, 곧 어우러짐을 추구한다. 풍류라는 말에는 이러한 어우러짐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 있으므로 듣는 이들을 평화로운 정신세계로 유도한다.
지난 주말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안에 있는 한 공연장에서 100명의 연주인이 새로운 힘찬 풍류음을 만들어 냈다. 빨간 두루마기 철릭에 검은 사모관대를 한 100명의 예인이 좁은 무대와 좌우 양편에 도열하기 위해 입장했을 때 청중들은 이들이 과연 무엇을 하는가 궁금했다. 주최 측의 설명으로는 이들도 모두 악기를 하는 전문 연주인들이었다. 대금 단소 해금 등 각자의 악기를 전공해 배우고 익힌 분들인데 앳된 얼굴도 보인다. 음악을 오래 하신 분도, 새로 해나가는 분도 함께 자리했다. 모두 100명이었다.
이들은 곧 앞줄의 악기를 들고나온 분들과 함께 입으로 소리를 내며 입으로 자신들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좁은 공연장을 넘어 남산골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수제천(壽齊天)」이었다. 그것은 진행자인 황준연 서울음대 국악과 명예교수의 설명 그대로 세계 초연이었다. 전통적인 수제천의 선율을 담당하는 악기들의 소리를 구음(口音), 곧 입으로 소리를 내어 연주하는 것이었다. 꽤 높은 소리인데도 음악인들은 16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입으로 곡을 연주해 냈다.
정읍(井邑)이라고도 하는 「수제천(壽齊天)」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향악, 곧 우리가 발전시킨 우리의 전통음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곡이고 가장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는다. 백제의 가요 '정읍사'의 반주였으나 지금은 독립적인 기악곡으로 연주된다. 작곡자는 알 수 없고 주로 궁중의 연례악으로 쓰이는데, '하늘처럼 영원한 생명'이 깃들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가진 음악이다.
프랑스의 민속음악 경연대회에서 대상(그랑프리)을 차지할 정도로 서양인들도 그 아름다움에 놀랐다. 백제의 노래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오면서 어느 틈에 궁중에서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우리음악이 되었고 그것이 우리들의 풍류에 딱 들어맞고 우리의 풍류에 의해 탄생한 것이기에 오늘날에도 어디서나 사랑을 받는데, 그 악기 소리를 사상 처음으로 입으로 내어 음악을 만들어 본 것이다.
서양의 단조에 해당하는 계면조로서 청아한 소리가 두드러지는 이 음악, 현악기와 관악기 타악기가 함께 어우러져 먼저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이 함께 연주하다가, 피리, 장구, 북이 쉬는 동안 대금과 해금의 이중주가 나오고, 다시 피리가 나오고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연음형식을 띈다. 전곡이 물이 흐르듯 이어지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16분이 다 지나가자, 청중들은 모두 박수로 이 멋진 공연을 축하하고 환영해 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우리 음악인 한음, 곧 한국음악의 탄생이었다. 이날 공연은 국내 최정상급 국악인 명인으로 구성된 양주풍류악회의 연주 100회를 맞아 특별히 기획된 것이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선조들의 풍류 얼을 이어감으로써 젊은 국악 명인들을 양성하자는 취지에서 2010년에 풍류한마당으로 시작된 이 풍류음악회가 15년 만에 드디어는 100회를 맞음에 따라 풍류음악을 현대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뜻에서 파격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악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화음을 맞추어 부르는 '아카펠라'를 응용한 수제천의 완전한 변신이었고 그것은 대성공이었다. 연주회에 오지 못한 음악 애호가들이 앞으로 이 음악을 영상으로 다시 접하게 되면 그 감동이 널리 퍼질 것으로 기대할 만할 멋진 순간이었다.
우리의 풍류를 잇고 전하는 이런 음악회를 100회나 이어온 것은 크라운해태 윤영달 회장의 우리 음악사랑 덕분이었다. 이러한 음악회 하나 준비하고 이런 음악인들을 격려하는 데 보통의 마음으로는 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남산골 한옥마을의 공연장 이름도 아예 크라운해태 공연장이다. 이곳이 풍류음악을 통한 우리 음악 발전의 전당으로 거듭 이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이번 100회 특집에는 양주풍류악회에 소속된 당대의 명인, 명창들이 모두 나왔고 영재 한음회, 화동정재, 정가단 아리 등 영재 음악인들이 함께했다. 모두 우리 음악을 짊어지고 갈 영재들이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모음곡 「천년만세」, 궁중 정재의 하나인 「춘앵전」, 맑고 높은 소리를 낸다는 대금곡인 「청성곡」, 정가단 아리 어린이들이 연주하는 여창가곡 「계락」, 부자가 된 흥보 집에 찾아가 잘 얻어먹고는 화초장 하나를 들고 가는 놀보를 놀리는 「벗님과 화초장 타령」 등 5곡이 다앙하고 하려하게 펼쳐진 뒤에 마지막으로 음악회의 대미를 「수제천』이 장식했다. 황준연 교수는 이런 음악에는 그동안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나오셨는데 이번에는 젊고 아름다운 영재들이 등장해서 더욱 멋진 공연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백(百, 일백 백)은 아라비아 숫자로 100, 우리말로 ‘온’이다. 온은 ‘모두의, 전부의’란 뜻도 갖고 있다. 온갖, 온누리, 온 세상 같은 표현들이 바로 이것이다. 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단순히 숫자 100이 아니라 ‘모든 것’을 뜻한다. 양주풍류회의 백 회 공연, 그것은 15년 동안 갖은 형태로 이어져 온 우리 음악인들의 자존심 집결이었다. 말하자면 백회(百回)연주는 음악의 백회(百會)인 것이다.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이다. 한의학에서는 이곳에 몸을 구성하는 모든 혈(穴)이 모인다고 본다. 이곳에서 몸의 구석구석으로 피와 기운이 흘러내리고 모인다는 것이다. 묵묵히 남들이 보지 않는 가운데서도 백 회를 이어온 양주풍류회의 음악이 곧 예로부터 현재를 거쳐 앞으로 이어질 우리 음악의 혈맥을 이어가는 중요한 전통이자 역사임을 이날 다시 확인한 자리였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