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아름다운 사람.’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참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선뜻 정의하기는 어렵다. 개인마다 미의식이 모두 다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달라서 더 그렇다. 내 눈에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남의 눈에는 촌스럽게 보일 수 있고, 남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내 눈에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이렇듯 ‘미(美)’라는 것은 갑론을박이 무성한 주제이지만, 어떤 문화권에서 대체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는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모레퍼시픽재단의 지원 아래 아시아의 아름다움을 규명하는 긴 프로젝트의 중간 보고서로 나온 이 책 《아름다운 사람》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미의식을 유려한 문체로 보여준다.
책의 구성은 책임연구원 백영서, 강태웅, 김영훈, 김현미, 조규희, 최경원, 최기숙 등 7명이 각각 ‘사랑’, ‘고독’, ‘꾸밈’, ‘성찰’, ‘수행’, ‘감각’을 주제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관점을 풀어놓는 방식이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은 언제 아름다움을 느끼고, 어떤 촉각, 미각, 시각이 아름답다고 인식하는지 ‘미적 감각에 대한 사유’를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성균관대 디자인학부 최경원 교수가 쓴 ‘삶의 꾸미는 인간: 조선시대 지식인의 삶 공간과 그 속에서의 꾸밈’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여겼는지, ‘안 꾸민 것처럼 보이면서도 아름답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다.
최경원 교수는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자연스러운 모습이건만, 학자들이 한국 전통 조형 문화의 특징을 ‘소박함’, ‘자연스러움’, ‘무기교의 기교’ 등으로 설명하면서 옛날부터 별로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인식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조선시대 지식인은 꾸미고 장식하는 것과는 먼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조선시대라고 해서 삶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노력과 의지가 없었을 리 없다. 오히려 충분히 꾸미되 그것을 드러나지 않게 지극히 감추어 두었기에 ‘아는 만큼 보이는’ 고유의 미감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p.164)
꾸민다는 것을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매우 보편적인 인간의 정신 활동 중 하나라고 본다면, 조선시대 지식인의 삶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교하게 자신의 삶을 꾸미며 살았던 정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꾸민다는 것은 보통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더하는 일이다. 조선시대의 지식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들키지 않으면서 할 줄 알았다.
책에 따르면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운지〉를 보면 사대부가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곧 문방 도구, 각종 예술품, 서적을 사고 보관하는 문제, 여행방법과 도구 등 총체적인 생활방식이 정리되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격조 있는 삶’이란 단순히 방 안에서 경서를 읽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집터 잡기, 주변에 나무 심기, 우물 파기, 집 안에 화병이나 가구를 놓는 일 등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다루어야 했다.
전국에 있는 고건축을 답사한 지은이는 조선의 지식인이 서유구의 지침처럼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각 요소를 매우 정교하게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무엇을 더 많이 만들거나 무엇을 더 넣어 물질적으로 장식하려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무형의 철학적 아이디어나 단련된 미적 감수성으로 꾸미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전남 담양의 소쇄원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 잡은 ‘광풍각’이라는 정자는 실제로 가서 앉아보면 사방으로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이는 언뜻 보면 무심히 정자를 지은 것 같아도, 그 정자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주도면밀하게 편집한 절묘한 공간배치, 곧 ‘마름질(트리밍)’이 있었기 때문이다.
터 잡이는 그래서 달리 말하면 건축적 ‘마름질’이기도 하다. 대단히 뛰어난 구도 감각, 정자 안에 앉는 사람의 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지은이는 결과적으로 소쇄원의 주인은 크고 아름다운 바깥의 자연으로 실내를 가득 채울 수 있었고, 겉으로는 소박하고 청렴해 보여도 실제로는 대단히 ‘꾸밈’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는 점을 짚는다.
이런 대자연을 끌어들여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단순히 집 장식을 화려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신적 노력과 고도의 계산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이름난 안동의 병산서원도 누대의 지붕이 산의 아랫부분을 가리면서 산의 원근감을 없애 마치 산이 서원 마당으로 들어올 듯이 가깝게 느껴지는 ‘아이맥스 영화관’급 감각을 구현했다.
지붕 위로 펼쳐지는 산의 흐름이 매우 강한 운동감을 형성하면서, 차분하고 엄숙한 서원 내부가 산의 역동적인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인격을 연마하는 학문의 장이라고 해서 답답하고 통제된 느낌만 드는 것이 아니라 산의 기운을 끌어들여 탁 트인 효과를 내는 것이다.
또한 누대의 지붕이 공간을 막고 있다면 그 위와 아래의 공간은 뚫려 있고, 마당은 다시 막으면서 음과 양이 어울린 태극의 공간을 연출한다. 그래서 단순한 공간인 것처럼 보여도 전혀 좁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막힘과 뚫림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리듬’이 사실 다른 어떤 면보다도 한옥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p.178)
음과 양의 두 요소를 반복하면서 천변만화하는 공간을 직조해 내는 건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일본이나 중국의 건축이 한국과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뚫림과 막힘을 철학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가구 또한 건축과 마찬가지로 음양의 원리를 살려서 ‘지어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건축과 가구가 연속되는 분야여서, 집 짓는 사람을 ‘대목(大木)’, 가구 짜는 사람을 ‘소목(小木)’이라 했다. 집을 음양이 교차하는 질서로 꾸민 것처럼 가구도 음양의 운율을 고려했다.
조선시대의 가구는 대부분 막힌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뚫린 부분이 있고, 막힌 부분이 없이 완전히 뚫는 예도 있는데 사방탁자가 그러하다. 이는 음양으로 이루어진 태극의 논리보다 그 이전 단계인 ‘무극(無極)’의 원리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가구와 건축에는 언뜻 무심해 보이지만 실은 세심히 꾸민 흔적이 가득하다. 자연스럽게 행동해도 예에 어긋나지 않고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양과 노력이 필요한지는 잘 알 것이다. 조선시대의 미감 또한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기까지 무수한 고민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미의식은 사물을 바라보는 총체적인 안목의 높이다.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가치체계나 성향을 많은 부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아름답다고 보았던 미감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사람들의 높고 아름다운 사유체계가 보인다.
그동안 몰라봤을 뿐, 자세히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한옥과 고가구다. 이 책은 그런 매력을 알아볼 수 있는 길잡이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좋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아모레퍼시픽재단의 안목과 노력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