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의제가 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더욱 연구하여, 그것도 두뇌집단인 집현전의 집단지성을 통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나갔다.’(以爲恒式)
그 가운데 경연 등을 통해 옛 문헌을 공부하고 현실에서 고쳐 나갈 길을 찾으려 했다. 그 첫 번째 과제로 옛 문헌이나 관례를 찾는 ‘고제이문(古制以聞)’이 있다.
둑제(纛祭)에 대한 의견
한 예로 세종 12년 둑제를 지낼 때 무반의 참여 여부를 문헌에서 찾는다. 이에 무반의 배제를 허락지 말 것을 건의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교지(敎旨)를 받자온즉, ‘서반(西班)에서 호군(護軍, 정4품의 무관) 이상은 둑제(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둑[纛]에 지내는 국가 제사)를 지낼 때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함)를 드리지도 않고 배제(陪祭, 임금을 모시고 함께 제사 지냄)도 드리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하니, ‘옛 제도를 조사하여 들이라. 옛 문헌이나 관례를 찾으라고 하셨사온데, 《홍무예제(洪武禮制), 국가 예법을 기록한 책》를 자세히 보면, ‘모든 지방의 수어관(守禦官, 산성을 지키는 관리)은 모두 관청 청사 뒤에 대를 쌓고 기독묘(旗纛廟, 사당)를 세우고 신위(神位)를 설치하여 놓고 봄철의 제사는 경칩(驚蟄)에 지내고, 가을철의 제사는 상강(霜降)에 지내며,... 제사가 있기에 앞서 모든 관리는 하루 동안 재계를 드리고, 제사 지내는 날이 되면 수어 장관(守禦長官)은 무관복(武官服) 차림으로 삼헌(三獻)의 예를 집행한다.’《홍무예제》에 의하여 제관과 여러 집사자 이외에 다른 무반(武班)은 제사에 함께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옵소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12/11/12)
현재의 혼란을 옛날 법제를 찾아 따른 한 예이다.
다음은 오늘날에도 문제가 제기되는 친족 간의 혼례 문제의 예가 있다.
동성 간의 혼인 풍속
세종 12년에 있었던 고려조의 동성 사이 혼인 풍속에 관한 이야기다.
임금이 좌우 대신에게 이르기를, "유정현(柳廷顯)이 일찍 나에게 말하기를, ‘고려 때에 왕실에서는 같은 성끼리 혼인하였고, 양반들도 그렇게 했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이를 고치기를 주장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하니, 고려 때의 혼인은 과연 그러하였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같은 성끼리 혼인하면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다.’ 했는데, 왕씨(王氏)가 5백 년 동안이나 오래도록 임금이 되었는데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였는데, 혹 그런 이치도 있는 듯하였다. 옛사람도 같은 성의 조카딸을 왕비(王妃)로 삼은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말할 가치도 없다. 성인이 인간의 상정을 참작하여 예법을 마련하는 데 다른 성은 5, 6촌이면 복을 입지 않게 하였으니, 곧 그것은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성인의 제도를 지나쳐서도 안 될 것이요, 못 미쳐서도 안 될 것이다. 본조에 와서 결혼의 예법이 처음으로 바로잡히어, 다른 성도 5, 6촌에서는 혼인을 하지 못하게 마련하였으니 좋은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족속을 구별하기 위하여 오래도록 서로 혼인을 못 하게 하고 보면 간간이 추잡한 소문도 나게 된다. 그런즉 ‘집현전(集賢殿)이 옛 제도를 조사하여 올리게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5, 6촌끼리 서로 혼인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녀는 구별을 두는 것이 중요하였다. 우리 왕조에는 양반의 풍속에, 아내의 형제와 마주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금지해야 한다. 내가 일찍이 조모(趙慕)의 딸을 궁중으로 들여오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는 나와 7촌이었다. 7촌 문제 외에 다른 문제가 없지만, 이런 것은 중대한 문제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고 마땅히 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한다." 하였다. (《세종실록》 12/12/18)
오늘날에도 본보기가 될 만한 예다.
벌을 주는 것에 대한 의견
세종 28년 벌을 주는 것에 대하여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과 의논했다.
’이계전(李季甸)에게 말하기를,...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니, 대신(大臣)이 후세(後世)의 임금이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염려하여 의견을 아뢴 것이니, 그 뜻이 대단히 좋으나, 그러나 죄가 용서할 수는 없는데 반드시 꺼리어 숨기고자 할 자, 반드시 대를 잇는 아들에게 말하지 못할 자가 후세에 있을 것이니, 그때에는 오늘의 의논이 꼭 행하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융통성 있는 도리를 생각하여야 하겠으니 ‘비밀히 예전 제도를 찾아보고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 28/5/20)
공법(貢法)의 폐단에 대해
세종 28년 공법(조세법)의 폐단을 논한 이계전 등의 상소가 있어 이를 의논했다.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이계전(李季甸)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국가에서 답험(踏驗, 논밭에 가서 농작의 상황을 실지로 조사하던 일)의 법이 정(情)에 따라서 가볍거나 무겁게 할 수 있어, 오랫동안 큰 폐단이 되어 왔으므로, 이에 공법(貢法)을 세웠으니, 신 등이 처음에 이 제도를 보고 또한 아름다운 법으로 생각하였사오나, 시험한 지 여러 해에 백성의 원망과 탄식이 날로 깊어지니, 아마도 백성을 편케 하는 좋은 법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지난번에 아홉 가지 일을 조목조목 고할 때에 공법(貢法)을 첫째로 들어서 올렸던 것입니다. 의정부(議政府)에 명을 내리시어 의논하고 그 제도를 변경하였으나, 오히려 말할 것이 있어 다시 좁은 소견을 가지고 전하께서 듣기에 너저분할지 모를 것을 고하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곡라 정하소서.
속전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죄를 범하고 내는 속전(贖錢, 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을 아무 곳에서 받는다.’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는데, 실려 있는 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 혹시 《당률소의(唐律疏議. 당률의 주석서)》가 아닌가. ‘집현전에서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 28/6/18)
세종은 어려운 일을 맞으면 옛 제도를 찾아 살피는 규칙을 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