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임세혁 교수]
2012년 10월 6일 자 빌보드 차트 순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2위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8년 정도가 지난 2020년 9월 5일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빌보드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우리랑은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빌보드는 이제 한국 음악 시장의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김치와 태권도만이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과거와 달리 K-POP이라는 우리의 대중음악으로 외국에 우리를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임세혁의 K-POP 서곡’은 아무것도 없는 맨땅 위에 치열하게 음악의 탑을 쌓아서 오늘에 이르게 만든 음악 선학들의 이야기다. |
아침에 평소에 하던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으로 뉴스 기사를 훑어보다가 한 부분에서 눈길이 멈췄다.
[속보] 학전 이끈 김민기 별세... 향년 73세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곡 <아침 이슬>의 작곡가이자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대표되는 대학로의 전설적인 극단 ‘학전’의 수장인 김민기의 별세 소식이었다. 한국 첫 자작가수(싱어송라이터) 음반을 발매한 음악인이자 수많은 배우를 키워낸 한국 대중예술계의 거장이 떠나간 것이다.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대학로의 극장 학전은 출신 배우들과 김민기의 영향을 받았던 음악가들의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진행하였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창립 33주년인 2024년 3월 15일에 폐관하였다. 한국 문화예술위원회가 인수하여 어린이 극장으로 개편되면서 학전의 이름을 유지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김민기는 인수된 극장에 학전의 이름이 쓰이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배움의 밭’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전은 대학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앞으로 나오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다. 2018년에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손석희 앵커와 나누었던 대담에서 그는 “왜 이렇게 안 나오십니까?”라는 앵커의 질문에 자신은 ‘앞것’이 아니라 ‘뒷것’이라고 지칭을 하면서 노래를 만들었을 뿐이지 가수를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나서는 것이 불편하다는 대답을 했을 정도다.
그는 언론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홍보하지도 않았고 높은 자리를 원하지도 않았다. 민주화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고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가기도 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학전의 ‘뒷것’으로 남았다. 문화 예술계에서도 매 정권마다 예술인들이 정치권에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곡 <아침 이슬>의 작곡가인 그가 끝까지 학전 소극장 운영에만 집중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의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 다른 가수들도 그의 노래를 많이 불렀지만 나는 작곡가인 김민기 자신이 부른 그의 곡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너무 저음이어서 가수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스스로 평했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가 그의 가사와 멜로디가 만났을 때 주는 울림이 너무나 좋다. 우리말로 수려하게 써 내려간 시적인 가사에 서정적인 멜로디가 얹힌 그의 노래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보다는 숫제 사랑한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에 교수님들이 한국 노래를 한번 불러 줄 수 있겠냐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불렀던 곡이 <아침 이슬>과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정도다.
그런 연유로 나는 초보자들에게 기타 강습을 하게 되면 <아침 이슬>과 <작은 연못>을 많이 추천하는 편인데 하루는 취미로 배우시는 나이가 많으신 학생 한 분이 내가 준 <아침 이슬> 악보를 보면서 나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음치라서 그러는데 이 곡을 한번 기타 치면서 불러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묻지 않았다. 자신만의 이유가 있었을 테고, 사실 뭐 혼자서도 기타 치면서 자주 부르는 곡이니 나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늘 있던 일처럼 그렇게 <아침 이슬>을 조용히 부르기 시작했다.
학생분은 눈을 감고 내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노래를 마치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 길지 않은 나의 노래를 듣는 동안에 감은 두 눈 속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에게 누군가가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아침 이슬>이 그가 지나온 시간과 겹쳐서 내가 부르는 무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는 걸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의 노래는 누군가에게는 위로였고, 젊음이었고,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가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를 들으면서 누군가는 그 노래를 즐겨 불렀던 전직 대통령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1998년 골프선수 박세리가 우승한 US여자오픈을 떠올릴 것이다. 옛날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억누르려고 했던 김민기의 노래들은 누가 그렇게 의도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곁에 저마다의 의미로 자리 잡아 같이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1953년에 출간한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에 보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누가 시킨 사람도 없는데 홀로 묵묵하게 나무를 심어서 결국에는 울창한 참나무 숲을 만들고 풍요로운 마을을 재건한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인물이 나온다.
김민기는 1978년에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만든 이후에 정권의 탄압으로 비공식 활동마저도 힘들어지자,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난 이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대학로에서 사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의 밭은 그가 만든 소극장 학전이었고 우리는 그의 밭에서 이룬 결실을, 대중문화예술계를 통해 마음껏 즐겼다. 그의 모습에서 나는 엘제아르 부피에를 본다.
시간이 흘렀고 농부는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학전은 사라졌지만, 그가 뿌린 씨앗들은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거목들이 되었다. 그는 묵묵하게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었고 절대 굴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타협하지 않고 지켜준 덕분에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노래와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이른바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고백한다. 나는 김민기의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가 온몸으로 부딪혔던 시대보다 한참 뒤에 태어나기도 했지만 비슷한 시기를 겪었더라도 장담하는데 그와 같은 용기랑은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멀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떠나는 길에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서 더할 수 없이 죄송스러우며 슬픈 마음이다.
믿음이 그다지 있는 편은 아니지만 좋은 곳으로 가셨다고 믿고 싶다.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임세혁
송곡대학교 K-POP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