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과 전통춤의 대명사, 김천흥 선생

  • 등록 2024.08.20 11: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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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9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혜강이 <해금>을 연주했다고 하는데, 혜강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연주했다고 하는 해금은 어떤 악기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현재까지도 주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악기, 해금은 중국을 통해 고려에 들어 온 이래,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전반, 그리고 근래에는 창작곡 연주에 널리 활용되고 있는 악기라는 점, 일정한 음자리가 없고, 연주자의 음감(音感)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음정 관계가 정확해야 한다는 점과, 연주법에 있어서는 줄을 당겨 연주하면서 다양한 농현(弄絃)이 일품이란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궁중음악 해금 연주자로서 유명했던 것과 겸해서 아쟁과 양금 연주자로도 유명했던, 아니 음악보다는 오히려 궁중정재(呈才)의 명인으로 더 많은 업적을 낸 김천흥 명인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선생의 아호는 심소(心韶)였다. 심(心)이란 곧 마음이고, 소(韶)는 바로 요순시절의 음악을 뜻하는 말이니, 선생의 성품이나 음악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아호일 것이다. 심소 선생(아래 심소)은 1909년에 태어나 2007년에 영면하였으니 99살을 일기로 평생을 궁중음악의 연주와 전통춤, 그러니까 전통악무와 함께 살다 간 분이다.

 

심소 김천흥이 전통악무와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22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14살 때,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 제2기생으로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주로 해금을 주전공으로 배우면서 겸공으로 아쟁(牙箏)과 양금(洋琴)과 같은 악기들을 익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더 큰 노력을 기울인 분야는 궁중무용이었다. 실제로 임금 앞에서 무동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아악부원 양성소의 5년 과정을 이수한 뒤에는 궁중행사의 악사와 무동으로 활약하는 한편, 하규일(河圭一)로부터 정가(正歌), 곧 가곡이나 가사와 같은 선비들의 노래를 익혔고, 궁중무용과 함께 한성준(韓成俊)에게는 민속춤을 배웠다고 한다. 심소는 1955년, <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개인의 무용발표 공연을 쉼 없이 펼쳐 왔다고 전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처용(處容)의 설화(說話)를 극화(劇化)한 작품, 곧 <처용랑(處容郞)>과 <만파식적(萬波息笛)>은 그의 출세작으로 알려져 있다. 심소는 국립국악원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학생들에게 해금과 아쟁을 지도해 주었는데, 오늘날 대학교수들을 비롯하여, 정상급 명연주자들이 대부분 심소 선생께 배운 제자들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악기를 배우든, 또는 춤을 배우든 간에, 선생의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심소 선생을 떠 올리면 특별하게 연상되는 인상이 떠오른다는 말인데, 그 첫째가 심소의 웃는 모습이라고 한다. 심소의 웃는 모습은 마치, 천진난만한, 꼭 어린 아기의 웃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유머도 풍부한 분이어서, 유머를 통해 상대를 웃음으로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마력(魔力)을 지닌 분이라는 점이다. 심소는 항상,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주위의 찡그린 사람들의 얼굴을 고쳐주는 특별한 성형외과 의사가 아닌가 한다.

 

셋째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분이다. 심소 선생과 나눈 대화를 참고해 보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소개하면, 매사 너무도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겸손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온 분이라는 점, 등등을 들 수 있다.

 

 

글쓴이는 오래전, 심소 선생과 나눈 대화 가운데 절대 잊히지 않는 대목을 간직하고 있다. 선생이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을 쉽게 알 수 있기에 독자들께 이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벌써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당시 국립국악원에는 FM 국악방송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글쓴이는 그 녹음실에서 선생을 모시고, <한국 근현대 예술사> 증언채록 작업, 6차분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 내용을 찾아보니, 선생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일부분을 이 난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글쓴이가 간단하게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한 것이다.

 

   - 선생님,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졸업하시고 바로 취업이 되셨나요?

   - 그럼, 공부하고, 졸업하고, 그대로 취직하고, 그런 훌륭한 제도가 어디 있는고? 우리는 참, 돈 받고,       배우고, 나라에 참 신세 끼치고, 그러고 여태까지 국록에 이렇게 사니, 정말 저 같은 사람도 없을

  겁니다. 국록은 나라의 돈이고, 국민의 돈, 국민의 세금이죠, 참으로 망극할 뿐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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