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진 효석문학100리길의 오솔길

  • 등록 2024.09.12 12: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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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문학100리길 제5-1구간 답사기 (18)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조금 더 오르자, 삼거리가 나오는데 평창바위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왼편 길로 가면 임진노성전적비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나는 혼자서 왼편으로 10여 미터 내려가 보았다. 커다란 임진노성전적비와 노성산성지 비석이 보인다.

 

 

 

노성산성지의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조선조(朝鮮朝) 중기 흉폭한 왜적(倭賊)의 침입이 있었을 때 이 고장을 지키려는 조상들이 피 흘려 싸운 곳이다.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것은 조선 중기라 하나 성을 쌓은 모양으로 보아 그보다 더 오래인 고려시대 이전에 이 고장을 지키려는 선민들이 쌓은 산성이라고 보는 편이 옳은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 공이 이 산성을 수축하고 전란에 대비한 바 있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많은 관민이 함께 피란했던 응암굴이 있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400여 미터의 작은 산성이나 천험(天險)을 이용하여 수축한 산성이다. 이 고장을 지켜온 호국의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자 표석을 세워 옛일을 후세에 전한다.

- 1984. 10. 7 평창군수

 

노성산성지 비석은 이곳이 “왜적의 침입이 있었을 때 이 고장을 지키려는 조상들이 피 흘려 싸운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평창군 발행 효석문학100리길 소책자에도 5-1구간을 소개하면서 “임진왜란 때에 격전지였던 노산성을 둘러보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려 필자로서는 매우 혼란스럽다.

 

평창문화원에서 2015년에 발행한 《평창군 지명지》 (집필 책임: 장정룡) 168~169쪽에는 노산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년(1592년) 3월에 평창군수로 부임한 권두문은 기존의 노산성을 중수하고 관속과 촌민 수백 명을 거느린 채 웅거하면서 동년 8월 7일 벽파령을 넘어 여만리 쪽으로 쳐들어온 왜군 모리길성부대 5,000여 명과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며 치열하게 접전하였으나 맞서지 못하였다. 성이 무너지자, 밤의 어두운 때를 이용하여 십여 리 떨어진 응암굴(鷹巖窟)로 피신하였다.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고 피가 물처럼 흘렀다고 하여 이곳 동편 구릉진 계곡을 가리켜 피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6년이 지난 2021년 3월에 평창문화원에서 발행한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판 (글: 정원대, 감수: 권혁진) 70쪽에는 《평창군 지명지》>와는 다른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왕에 발간된 《태백항전사》(1986), 《평창읍지(1986)》, 강원지방의 《임진왜란사(1988)》 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평창에 진입한 후 당시 권두문 군수는 지역민들과 함께 평창 노산성에서 전투를 벌이다 성이 함락된 후 응암굴로 들어간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이 응암굴 전투에서 패전하여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 전전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경험을 적은 일기 《호구일록虎口日錄》에 의하면 그러한 내용은 전혀 없고 일본군이 평창으로 진격해 오자 바로 응암굴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항전할 준비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지난 1982년 세운 ”임진노성전적비“와 1984년 평창군에서 기록한 내용은 적어도 사료적 근거는 없는 사항임. 출전: 임진왜란과 평창, 유재춘 강원대학교 교수”

 

내가 직접 《호구록》을 조사해 보았다. 왜적의 침입이 임박하자 권두문 군수는 참모회의를 연다. 참모회의에서 온건파와 강경파의 주장이 엇갈린다. 8월 7일 자 《호구록》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필자 주석: 권두문 군수의 작은 아들 이름)와 고언영(高彦英: 中房京人)을 비롯하여 모두 말하되, “정동(井洞)에 있는 굴에 들어가서 방어하는 것이 이롭다고는 하겠으나 적을 물리치는 데는 오히려 어려우니 아직은 형세를 두고 보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아마 삼도(三都)를 잃고 각성이 바람에 촛불 꺼지듯 하는데 여기 몇 안 되는 병사로 대항한다는 것은 나방이 불 속에 뛰어들 듯 그저 헛되이 죽을 뿐입니다. 동촌(필자 주: 미탄을 말함)도 평창군(平昌郡) 땅이고 또 험한 곳이며 영향(榮鄕 필자 주: 군수의 榮川本鄕으로 지금의 영주시를 말함)과도 인편이 잦고 하니 우선 동촌으로 가서 병사를 조련하고 복병도 하였다가 밤을 타서 적을 습격할 수도 있을 줄 생각되오며 만약 형세가 급하고 불리할 때는 그때 가서 응암(應岩)굴로 대피하셔도 좋을 줄로 아오니, 성주께서는 동촌으로 먼저 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지봉사(智奉事) 및 여러 군관(軍官)들이 모두 주먹을 쥐고 팔을 올리면서 큰 소리로 “응암 하험굴(下險窟)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군기와 장비도 그만하면 비록 많은 적이 온다한들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주께서는 동촌으로 가시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기에 나는, “내 뜻도 그러하다” 하고 응암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날 밤을 타고 적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입군(入郡)하였다. 급기야 배를 불러 강녀(康女), 주 및 고언영(高彦英)외 노비 4~5명을 굴에 들게 하고, 지사함(智士涵)과 품관(品官) 지대성(智大成), 우응민(禹應緡) 지대용(智大用) 지대명(智大明), 이인서(李仁恕), 이대충(李大忠), 충주에서 피란 온 최업(崔嶪), 우윤선(禹胤善) 및 관속(官屬), 백성 수백 명, 집안 권솔들과 함께 굴로 들어갔다.

 

《호구록》을 읽어보면 노성산성에서 전투는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노성산성 전적비는 어떻게 해서 세워졌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임진노성전적비는 1984년에 세워졌다. 당시는 권위적인 전두환 정부 시절이었다. 관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결정한 사항을 민간 학자가 나서서 감히 부정할 수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구록》을 직접 읽어보고 싶은 독자는 아래 주소로 들어가면 된다.

https://m.cafe.daum.net/suwonprofessor/RJe1/1002?searchView=Y )

 

 

노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산 능선과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평창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노산에 올라가 이처럼 멋진 경치를 감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평창바위공원에 낮 1시 45분에 도착하였다. 효석문학100리길 제5-1구간 7.5 km를 걷는데 4시간 15분이 걸렸다. 중간에 길이 끊어져 시간이 예상보다 더 걸렸다.

 

 

<답사 후기>

 

답사가 끝나고 평창읍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나는 오늘 길을 잃었던 곳에 차를 운전하여 다시 가보았다. 먼저 후평뜰 쪽에서 좁은 콘크리트 포장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중간에 100리길 표지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다 보니 콘크리트 길이 중간에 끊어지고 숲만 무성하다.

 

나는 다시 용항리로 가보았다. 우리가 길을 잃고 잠시 쉬었던 ‘염소 기르는 집’ 아래에 집이 또 하나 있다. 마침 집 주인남자가 나온다. 그에게 물어보니 자세히 설명해 준다. 원래 1934년에 주진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효석이 걸어서 넘었던 고갯길이 용항리에서 후평리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어렸을 때 마을 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랫동안 다니지 않아서 길은 사라지고 길이 있었던 땅은 사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에 평창군에서 효석문학100리길을 만들 당시에 오솔길을 만들었는데, 그 후 관리를 하지 않아 지금은 오솔길도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효석문학100리길 소책자에 지도가 있고, 또 카카오맵에도 100리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남자는 “어제도 자전거를 타고 여섯 사람이 여기까지 왔는데, 자기가 길이 없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라고 대답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투덜대면서 되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그 남자에게, “우리처럼 걸어서 오는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가끔 지도 들고서 혼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자기를 만나면 설명을 듣고 돌아가지만, 자기가 없을 때는 아마도 헤매다가 돌아갈 것이다”라고 남의 말 하듯이 말한다.

 

 

아이고,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효석문학100리길 지도를 믿고서 여기까지 왔던 사람이 길이 없어서 헤매면 얼마나 황당할까? 다혈질인 사람은 욕을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욕은 누구를 향할까? 평창군 관계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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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ㆍ왕수복, 이름은 남았으니...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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