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
공자의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일의 잘못을 주의하여 뒷날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심한다.”
이 구절이 바로 《징비록》을 쓴 이유이다.
징계할 징(徵). 삼갈 비(毖). 부끄러운 잘못을 스스로 꾸짖고 앞으로 삼갈 바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승리를 복기하기는 쉬워도, 패배의 자취를 더듬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 특히 한 나라의 정승으로, 임금 다음으로 그 패전에 책임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징비록》을 쓴 유성룡의 ‘책임지는 용기’가 대단한 까닭이다.
최지운이 쓴 이 책, 《책임지는 용기, 징비록》은 망국이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시기, 전쟁을 총지휘하며 이끌었던 한 재상의 ‘전쟁회고록’을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전후 사정뿐만 아니라, 최고위급 관료가 아니라면 알기 힘든 세세한 일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훗날 숙종은 책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기도 했다.
전쟁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던 유성룡은 모든 사건을 보고받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누구보다 전쟁에 대해 총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전쟁을 가장 높은 시점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이런 인물이 붓을 들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을 둘러싼 각종 내밀한 정보가 아깝게 사장될 뻔했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 말기의 어지러운 조정 상황이 이 기록을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유성룡은 전쟁을 이끈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모함을 당해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고향 안동으로 낙향한 그는 홀로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사이 조정에서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 다시 관직을 제수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징비록》 집필에 전념했다. 참혹한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을 테지만,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차분히 기록으로 남겨 불행의 반복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p.8)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태로운 나라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시골구석에 살아남아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모르겠다. ...(가운데 줄임)...임진왜란의 징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잘못과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무능과 적에게 무참히 짓밟힌 현실을 사실대로 서술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책임과 나라와 백성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징비록》에 모두 담고자 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건국 200년 만에 벌어진 초유의 국난에 크나큰 책임을 질 만한 자리에 있었던 정승급 인물이 솔직히 자신의 과오를 시인한 점이다. 전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남 탓’을 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내 탓’을 한 기록을 찾기도 정말 어렵다.
부끄러운 일일수록 숨기고 잘못을 덮고자 하는 것이 어쩌면 인지상정이건만, 이렇게 ‘책임지는 용기’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책임질 만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며, 애꿎은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본인은 빠져나가는 일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재상 유성룡은, 최소한 ‘책임지는 용기’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이처럼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었고, 어떻게 봉합되었는지 내밀한 사정까지 살펴볼 수 있는 진귀한 기록이나, 오히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덜 알려진 감이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차분히 써 내려간 《징비록》은 명실상부한 ‘난후일기’라 할 만한데도 말이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덕목 가운데 ‘책임지는 용기’는 특히 중요하다. 재상 유성룡도 많은 결점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용기가 부족하진 않았다. 그를 둘러싼 공(功)과 과(過)를 평가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대목이다. 여러 가지 일에서 크고 작은 책임을 지고 있을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