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강제노역을 지워나간 일본

  • 등록 2024.12.29 11: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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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참혹하게 죽어간 구로베가 또 세계문화유산?] 5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지난 기사에서는 구로베의 고열터널에서 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가 자연폭발 해서 몸이 흩어지고, 괴력의 눈사태로 인해 숙소 채로 내동댕이쳐져 몸이 찢겨 죽은 조선인들에 대해 얘기했다. 최근 구로베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일본은 일찌감치 조선인의 흔적을 지워나갔고 일본인의 손으로 자연을 이겨낸 문화유산이라고 당당하게 자랑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구로베에서 이렇게 고통 속에 죽어간 조선인들의 기록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또한 극히 일부이지만 조선인들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해 온 일본인도 함께 조명해 보겠다.

 

기록소설 《고열터널》이 지운 ‘조선인’, 그리고 역사에서 삭제된 ‘조선인’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는 구로베의 제3발전소 공사를 조사하고 증언을 살려서 소설 《고열터널(高熱隧道)》을 썼다. 이 소설에서는 일하는 사람을 기술자, 인부장, 인부 이렇게 셋으로 나누면서 터널에서 참혹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부’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칭했을 뿐 한 번도 ‘조선인’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이 공사에 종사한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조선사람인데, 강인한 체력을 구사해서 끝내 터널을 관통해냈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조선사람을 노동자로 사용했다고 하면 학대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다른 곳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급여가 매력이 되었다. 어쨌든 조선사람이라고 쓰면 주제가 묘하게 틀어져 버릴 우려가 있어서 그냥 노동자라는 형태로 밀고 나갔다. 또한 나의 주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픽션으로 썼다.”, “나는 주제의 발목을 붙드는 요소는 가차 없이 버리고 주제를 살리는 사실만 사용했다.”(《波》, 新潮社, 1970年. 5.6월 닛타지로(新田次郎)와의 대담)

 

 

기록문학이나 역사소설은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여져서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요시무라의 《고열터널》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을 살려내고 있어서 박진감이 있다. 그래도 소설은 소설이다. ‘기록문학’으로 높이 평가받고는 있지만 요시무라가 주제를 방해하는 요소를 없애버린다며, 실존했던 ‘조선인’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다.

 

 

시미즈 히로시(清水弘)는 《고열터널》이 기록문학으로서의 값어치가 크지만, 그 때문에 ‘문학’이 사실을 그린 충실한 ‘역사’로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진설 《고열터널》)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호리에 세츠코(堀江節子) 씨가 1990년 전후에 취재했을 때는 우나즈키(宇奈月)나 구로3 현장에서 일했던 일본인은 조선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반공식적 기록에 조선인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구로베에는 조선에서 단신으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현장식당(함바)을 운영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구로베 협곡 입구인 우나즈키에 살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그 아이들의 동급생이나 농한기에 협곡 공사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우나즈키를 포함한 우치야마 인구 4,830명의 1/3을 차지했던 조선인은, 그들 마을의 역사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또한 호리에 씨는 이 어려운 공사를 이뤄낸 사토(佐藤)공업주식회사의 연혁인 <110년의 발자취>에서도, 도야마신문사의 《엣츄(도야마의 옛이름)의 군상(越中の群像)》(1984)의 <구로베 터널과 “구로3”건설>에 대한 글이나, 《도야마현 경찰사》(1965), 《구로베강의 발자취 자료집》(1978년, 건설성 호쿠리쿠지방건설국) 에서도 소설 《고열터널》의 기록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조선인을 지우고 있음을 밝혔다.

 

 

이런 흐름을 이어받아 도야마현이 일본 문화청에 제출한 구로베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제안서에도 조선인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조선인 없이는 완성할 수 없었던 구로베댐’인데도 이 정도로 《고열터널》의 영향은 크다. 요시무라의 의도가 어떻든 대부분의 독자는 ‘조선인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호리에 세츠코, 《구로3댐과 조선인 노동자》, 193~194쪽)

 

《구로베의 태양》에서 ‘일본인 외의 많은 사람’은 누구였나?

 

구로4댐 공사를 다룬 《구로베의 태양》에서는 구로3댐 공사의 고열터널 공사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센닝다니 바로 옆에 유황온천이 흐르고 있고 암반 전체가 백수십 도나 되는 고열 지대니까요. 광부들은 호스로 머리부터 냉수를 맞으며 파 나아갔는데, 간신히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하려고 하는데 불도 붙이기 전에 폭발해 버리는 일도 있어서......

 

(가운데 줄임) 몇 명의 희생자가 나왔는지 몰라요. 지금 그런 상태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공사예요. 그런데 당시는 전쟁 중에 군의 절대명령으로 인간 희생을 무시하고 강행되었어요. - 일본인으로는 이 막노동할 사람을 구할 수 없어서 일본인이 아닌 많은 사람까지 반강제적으로 잡아들여서...... 신문에도 실리지 않고, 세상에는 그런 비참한 공사가 구로베 산속에서 일어났으리라고는 아무도 몰랐겠죠.”(132쪽)

 

 

여기에서 ‘일본인이 아닌 많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기모토 쇼지(木本正次)는 《구로베의 태양》에서 지옥 같은 구로3댐 공사를 하는 사람을 ‘일본인이 아닌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구로3댐 공사를 직접 다룬 《고열터널》에서는 ‘인부’라는 말로 ‘조선인’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당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기록한 신문기사에는 반도인(半島人)으로 기록되어 조선인의 이름까지 게재되어 있다. 호리에씨가 지역 사람들에게 들은 증언에서도 “고열터널에서의 작업은 조선인이었기에 가능했다. 목숨을 걸어야 했기에 아무리 높은 임금이라도 일본인은 터널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84~85쪽) 그런데도 《고열터널》도 《구로베의 태양》도 일부러 ‘조선인’을 작품 안에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관서전력 기록영화 <구로베를 열다>는 한술 더 떠서 “일본인 우리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대출력 발전소 구로베 제3댐이 4년이라는 공사 끝에 드디어 완성되었다.”라고 했다.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53쪽. 재인용)

 

덧씌워진 조선인관

 

우치다 스에노는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에서 조선인 관련 사건이 신문에 큰 제목으로 게재되면서 조작된 조선인 이미지가 도야마현에 이식되어 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문에 왜곡된 선인의 추악한 범죄 기사를 실어서 조선인이 성급하고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태만하다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우치다 스에노는 각 기사의 진위를 분석하여 기사의 추악한 의도를 지적했다.

 

당시 신문이 조선인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 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국가 권력자가 국민에게 기대하는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고 간파했다. 자신의 연구가 ‘저 발전소에, 이 도로에 당신의 나라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습니다.’라는 감사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고, 한일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하면서 이웃나라와 우호를 다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추모와 위령

 

구로3댐 건설에서 300명 이상이 죽었다. 공사를 진행한 회사 사토구미(佐藤組)는 눈사태가 난 시아이다니에 목조 불상과 불당을 건립해서 추도 법회를 열고 있고 아조하라에도 아조하라 순난(殉難) 기념비가 있다.

 

우나즈키 야쿠시데라 묘지의 ‘만령지탑’에는 무연고 구로베 희생자들이 묻혀있다. 오봉(추석),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피안(춘분과 추분 전후 각 3일 동안을 합한 7일 동안)에 정성껏 불공을 드리고 있다. 고노가와 준코는 만령지탑 건설의 유래가 담긴 ‘구로베 개발, 온천개발 만령지탑 기원’ 전문을 책에 담았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구로베 개발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었는데 주검을 수습하지 못한 무연고자들이 많았다. 다이쇼 말기 ‘다시다이라’ 눈사태로 35명, 1938년12월27일 시아니다니 눈사태로 84명, 1940년1월9일 아조하라 눈사태로 26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또한 1936년에서 1940년까지 고열터널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포함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이들을 위해 앞으로도 8월7일이면 참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경지탑의 기원 글 가운데 “아이고, 아이고” 하며 울부짖는 흰옷 입은 사람들의 이국적인 장례식이 눈에 선하다.’라는 표현이 가슴에 박힌다.

 

이밖에 전후에 건설된 구로4댐 건설 희생자 171명을 위한 순난비, 온천마을의 야쿠시데라 입구의 구로베 개척 순난자 공양탑, 오오하라다이에서 구로베강이 내려다보이는 평화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이국땅에 와서 희생당한 조선인 무연고자의 주검을 이렇게 수습해서 아직도 참배하고 불공을 드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조선인 희생자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쓴 고노가와 준코, 호리에 세츠코, 우치다 스에노가 있었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구로베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일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어떤 고통 속에서 희생당했는지도 알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래서 마에다 아키라(前田朗)는 호리에의 《구로3댐과 조선인 노동자》를 ‘사실을 무참히 지우는 역사수정주의자에 항거해서 기억과 기록을 되살렸다’고 평했다.(<사라진 조선인 노동자-구로3댐과 고열터널>, 《사회민주》, 2023.9.) 이러한 기록의 노력은 희생되신 분들을 기억하여 소환하고 위로하는 진혼 의식이기도 하다.

 

연재를 마치며

 

일본은 일본 내 가장 큰 규모의 구로베 수력발전소를 ‘혹독한 자연을 이겨낸 인간의 위업’으로 자랑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차근차근 준비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인간이 들어설 수 없는 지옥 같은 환경에서 노동하다가 목숨을 잃은 많은 조선인이 있었다. 조선인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위업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가혹한 노동에 대한 지탄을 두려워하고 강제노동에 대한 규탄이 두려워서 역사의 진실을 지워나가는 역사수정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마에다 씨가 ‘어둠에 묻힌 역사의 사실에서만 미래로 가는 가교를 찾을 수 있다’라고 했듯이, 일본은 미래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한 한일 우호를 원한다면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내야 할 것이다.

 

우리도 눈앞의 이익이나 일방적 우호를 위해 웃으면서 진실을 덮어둘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일본이 새롭게 걸어오는 역사 전쟁임을 인식해야 한다. 사도광산은 일본 시민단체가 198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 피해자와 유족을 발굴하고 사도 자치체와 긴밀하게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우리와 연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사도광산에 조선인도 있었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강제 동원’이었다는 역사는 남기지 못한 채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승낙해 줬다. 앞으로 우리는 일본 현지인과 협력해서 사도광산의 진실을 역사에 남기도록 촉구해 나가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

 

구로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아시오광산은, 조선인 말고도 중국인과 연합국 포로들이 강제동원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연대해서 대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구로베는 오래전부터 조선인에 대한 기록을 지워나갔기 때문에 가장 불리한 상황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로 외교에 임하는 분들에게 당당히 맞설 힘을 제공해야 하고 우리 시민들도 적극적인 마음으로 구로베의 진실에 대해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류리수 기자 ristina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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