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우리가 흔히 대만이라고 읽고 중국 발음으로는 타이완(臺灣)이라고 하는 이 작은 섬나라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49년 중국 대륙을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의 공산당 세력에 내주고 섬나라로 내려온 장개석(蔣介石, 장제스)과 국민당 정권일 것이지만 관광으로 대만을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도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꼽히는 고궁박물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박물관의 소장품의 수는 70만 점이나 되어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이라고 하기도 하고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넣어 5대 박물관이라고도 하는데 어떻든 유물이 그만큼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고 워낙 유물이 많아서 박물관에서는 3달에 1번씩 전시하는 소장품을 교환 전시하고 있는데도 모든 소장품을 관람하려면 8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런 점들이 대만 관광의 포인트로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흔히들 고궁박물관이라고 말하지만, 정식 이름은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으로 대만(정식 국호는 중화민국)의 행정원 산하기관이다. 잘 알다시피 이 박물원에는 중국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이동할 때 대륙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대부분이다. 장개석은 중국 전통문화와 문물의 값어치에 대해서 애정과 안목이 높았다.
평소 지론이 '나라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문물 없이 살 수 없다'라는 것이었고, 일본의 침략전쟁, 자신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 간의 전쟁(이를 국공내전이라고 부른다) 와중에도 북경(北京, 베이징) 자금성(紫禁城) 고궁박물원에 있던 유물 가운데 남경과 상해로 옮겨놓았다가 패주가 확실해지자 서둘러 대표적인 유물, 문화재들을 대만으로 가져왔다.
의미 있는 것은 국민당 정부가 유물들을 수십 척의 선박으로 대만으로 옮기는 것을 당연히 공산당 정부도 알았지만, 조상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기에 이를 폭격하지 않았고 보내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대만의 고궁박물원은 이후 추가로 유물을 매입하거나 기증받아 소장품이 현재 70만여 점에 이르고 있다. 가장 정수가 대만으로 왔기에 오늘날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북경이 아닌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꼭 가야 할 정도라고 말한다.
벼르고 벼르던 대만 여행을 하는 기회가 생겼다. 1989년 6월 잠시 대만을 다녀간 이후 36년 만이다. 3박 4일의 일정 가운데 오전 하루만을 내는 것이어서 충분히 볼 수 없는 것을 감안하고서도 대만의 수도인 대북(臺北, 타이베이)의 사림구(士林區, 스린취)에 있는 고궁박물원에 들어가며 기대와 흥분이 일었다.
정면 입구 안쪽 홀에 큰 동상이 하나 있다. 바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을 건국한 손문(孫文, 쑨원, 1866-1925) 선생이다. 장개석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으로 내려와 유물들을 정리하여 고궁박물원을 대대적으로 다시 만들고 1965년 손문 선생의 탄생 100돌에 맞추어 동상 제막과 함께 정식으로 개관했다.
전체 면적 4천 평 규모로 중국의 전통적인 궁전건축 양식이지만, 북경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자색(紫色)과는 달리 녹색 기와와 황색 벽돌로 꾸며져 있고 4층 가운데 1, 2, 3층이 전시공간이어서 이어폰으로 여행안내인의 우리말 해설을 들으며 전시장을 돌았다. 아득한 주(周)나라로부터 한(漢), 당(唐), 송(宋), 그리고 원(元), 명(明,) 청(淸)으로 대표되는 5천 년 중국 역사의 중요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약 2시간 동안 전시장을 돌았다. 각 시대를, 번개를 타고 뛰어넘는 관람이었지만 단체관광객으로 간 신세에 더 어찌하겠는가?
소장품은 주로 역대 황제들이 사용하거나 즐겨 감상한 것들이고 청 황실이 남겨놓은 책 117만 권을 비롯하여 71만 점의 서화ㆍ도자기ㆍ옥ㆍ금은 공예품ㆍ복식ㆍ염직ㆍ칠기ㆍ문방구ㆍ가구 등 다양하고 진귀한 값어치를 지닌 문화재로 가득 차 있다. 이렇듯 고궁박물원은 역대 황실의 장구한 역사를 여실히 말해 주는 보고이자, 중국의 화려한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다.
장개석이 3차에 걸쳐서 운송한 유물은 방대했다. 다만 전쟁 상황인지라 유물을 급하게 가져가다 보니 무거운 것은 남겨두고 비교적 가볍고 포장하기 쉬운 서화와 서적류가 많은 것이 아쉬움이다. 예컨대 가볍고 아름다운 옥기(玉器)나 장신구 등의 유물이 많다. 이번 관람에서도 대만 고궁박물원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돼지고기나 배추 모양의 옥기가 거론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필자는 북경 특파원을 하면서 자금성의 고궁박물원에 있는 유물들도 보았지만, 이곳 대만에 있는 유물들이 더 중국을 대표하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나라 역대 왕(王, 당시는 황제의 명칭이 왕이었다)들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청동으로 된 정(鼎, 발이 세 개인 제기)의 바깥뿐 아니라 안쪽에도 많은 문자를 새겨넣은 것이 보인다. 이 유물들은 1911년 중국 청 황실이 무너지기 전까지 황실에서 모으고 지켜온 보물들이 위주가 되기에 당대 으뜸 기록이자 예술품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북경에 고궁박물원을 만든 것도 장개석의 국민당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자금성의 안뜰은 선통 폐황제의 처소로 변하였고, 바깥뜰에는 유물전시관이 세워졌다.
1924년 선통제가 출궁하자, 장개석의 중화민국 정부는 궁정에서 사용하거나 보관 중인 물품들을 정리하여 이듬해 1925년 고궁박물원의 문을 열었다. 이때 청나라의 원래 수도였던 심양(瀋陽), 황제의 여름별장인 승덕(承德) 두 행궁에 소장한 보물을 전부 베이징으로 옮겨와 합하였다. 그 유물들이 대만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만 정부는 이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이야말로 자기들이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였고 지금도 그 적통이라고 말하는 근거이자 이유인 것이다.
방방을 다니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자세히 들여다보려니 힘이 든다. 관람객들이 많아서도 그렇지만 벌써 몸이 힘들어하는 때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이 유물들이 중국 땅에서 대만으로 옮겨진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북한의 6.25남침 때에 개성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던 많은 고려시대 청자 등 도자기와 보물들이 고유섭, 최순우 등 당시 관계자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무사히 우리 품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전해지는 것을 회상한다.
한 나라의 문물이야말로 그 나라의 정신이자 뿌리인 만큼 이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실감하는 것이다. 2000년대 초 우리나라 남북 사이에 개성관광이 시범적으로 시행됐을 때 보게 된 개성의 박물관 유물의 초라함을 생각하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들의 의미. 그리고 장개석의 유물 존중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북경의 중국, 곧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71년 똑같은 이름의 ‘고궁박물원’을 베이징 자금성에 개관했다. 개관 당시에는 좋은 유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상당수 문화재가 대만에 건너간 까닭도 있었지만,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중국의 귀중한 유산이 말 그대로 궤멸적인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베이징의 고궁박물원은 남아있던 소장품을 정리하고 기증과 구입을 통해서 미술품을 수집하여 전보다 더 큰 규모로 개원하여 우리 관광객들을 맞는다.
이제 중국에는 장개석에게 빼앗긴 유물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여론이 없을 수 없다.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있는 귀중한 유물을 찾아서 합해야 진정 중국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것이 무력으로라도 대만을 합병하고 싶어 하는 중국인들의 속내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전시장이 넓지만, 소장 유물이 너무 많아 이날 하루 본 것은 전체의 10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몇 년 동안 계속 와서 보아야 하는 것이라는데 겨우 반나절 관람으로 무엇을 보았다고 할 것인가? 아무튼 지난해 대만을 관광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대 최대인 90만 명을 넘어섰고 이들이 모두 고궁박물원을 보고 갔다고 보면 이 문화재란 것이 결국은 나라 최대의 관광자원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대만으로 이 유물들이 옮겨갈 때 이를 폭격하지 않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들의 생각도 중요하다고 평가해 주어야 하겠다. 비록 상대의 수중에 들어가더라도 이를 강제로 뺏거나 파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중국인들을 세계 최대의 역사문화민족으로 남아있게 자랑스럽게 하는 핵심일 것이기 때문이다. 늘 전쟁의 위기가 그대로인 우리나라에서도 남북 사이에 혹 충돌이 생기면 이런 문화재들이 어찌 될 것인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나 문화재가 곧 우리들의 본모습이자 실체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