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임금, 넘쳐흐르는 청계천 바닥을 파내다

  • 등록 2025.03.17 11: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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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7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준천(濬川)의 대책은 역시 모색하기 어려운 일이더니,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 이미 조그마한 책자를 하나 만들도록 명하여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책이 완성된 뒤에는 서문을 지어 내리겠다. (가운데 줄임)’ 살펴보건대, 준천의 역사에 역민(役民)이 여러 십만 명이나 동원되고 경비(經費)도 십만여 전(錢)이나 소모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안위(安危)가 걸린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인가?

 

위는 《영조실록》 95권, 영조 36년(1760)년 3월 16일 기록으로 청계천 준천에 관한 내용입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한양은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전국 각지에서 이주민이 몰리면서 거주지 부족 현상이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개천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고, 이에 따라 개천 주변에는 생활쓰레기의 증가, 주변 산에서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한 토사물의 유입 등으로 인해 개천 바닥의 높이가 점점 높아졌지요. 이 탓에 개천은 비만 오면 넘쳐흘러 한양의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줬습니다.

 

 

이에 영조는 개천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 신하들과는 끈질기게 대화하여 결국 준천을 추진하였지요. 영조의 준천은 크게 경진년(1760년)과 계사년(1773년)에 진행했는데 경진준천 때는 천변까지 차오른 토사물을 걷어내고 개천의 배수구인 오간수문을 보수하였으며, 계사준천 때는 개천의 둑을 돌로 바꿨습니다. 영조의 준천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백성이 많았고, 별도로 임금을 주고 인부를 고용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낮추었지요 또 영조는 준천을 추진한 배경과 과정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을 펴냈고, 전담 기구 ‘준천사(濬川司)’도 설치하였으며, 《준천첩濬川帖》에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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