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민기 원년 4월 4일 내란 우두머리 파면 선고가 천하를 울릴 때 나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친손자다. 삶의 마지막 기간을 오늘날 헌법재판소 경내의 백송나무 자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환생하여 북을 치고 경을 치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헌법 재판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목소리, 집단지성의 공명이었다.
그 시원을 찾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의 홍익인간까지 이른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가깝게 근세 여명기의 환재 박규수에서 찾는 게 더 실감 날지 모른다. 그는 놀랍게도 20대 초에 근 200년 뒤의 한국을 내다보았던 것만 같다. “무당이 발호하거든 나라가 망할 때가 온 것임을 알라.” 그가 20대 초, 1830년 어름에 썼던 다음 글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린다.
“골짝과 덤불과 시내와 늪은 때로 사(邪氣)를 뿜고, 벌레와 물고기와 나무와 돌은 오래되면 요물이 되어, 이매망량과 같은 도깨비로 변한다.(…) 이것들이 왕왕 세상에 나타나 백성들의 재앙이 된다.
그러자 요사스러운 무당 박수가 장구치고 춤추면서 의기상통하는 무리를 불러내니, 줄줄이 함께 몰려든다. 좋은 술잔에 향기로운 술로 그 미각을 즐겁게 하고 빗자루질과 방울 소리로 청각을 홀리면서 천하의 귀신들을 불러, 한 몸에 모이게 한다. 귀신을 머리에 이고 귀신을 발로 밟으며, 귀신을 등에 업고 귀신을 껴안으며, 귀신의 말을 모방하고 귀신의 웃음을 본뜨며, 귀신의 관을 쓰고 귀신의 옷을 입고서는 자나 깨나 모든 행동이 한결같이 귀신의 부림을 받는다.” - 박규수, <상고도(尙古圖)> -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가 있는가. 내란 우두머리와 호위무사들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들이 지금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박규수는 또한 이렇게 영험하게 묘사했다.
“이것들은 대명천지에 용납되지 못한다. 밝은 신령에게 내쫓김을 당한다. 해와 달이 훤히 비추고 바람과 천둥이 뒤흔들며 뜨거운 불길이 태우고 거센 파도가 불시에 후려치면, 그것들은 간특함을 숨기고 추악함을 가릴 길 없어 숲속의 어두운 곳으로 달아나거나 물결이 드센 어둑한 물가에서 기회를 엿본다.” - 박규수, <상고도(尙古圖)> -
이 또한 오늘날의 모습이 아닌가. 그들은 정말이지, ‘간특함을 숨기고 추악함을 가릴 길 없어 숲속의 어두운 곳으로 달아나거나 물결이 드센 어둑한 물가에서 기회를 엿본다.”
두 명의 나쁜 대통령을 파면한 헌법재판소 자리에서 박규수가 살았던 것이 우연일까? 그는 사랑방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에게 기득권 철옹성 안에 똬리를 튼 양반들을 비판하고 격변하는 세상에 눈뜨게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지은 《양반전》을 은밀히 가르쳤다.
어느 마을에 몰락한 양반이 있다. 그는 관곡(관청의 곡식)을 빌려다 먹는다. 갚을 길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부자에게 자신의 양반 신분을 팔아넘긴다. 부자와 양반은 계약문서를 작성한다. 그때 부자인 농부는 너무나도 번거롭고 위선적이며 기생적인 양반의 민낯을 본다. 아연실색한 농부는 양반이란 도적과 같구나! 탄식을 토하면서 양반을 물리고 만다.
박규수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은 것 같다. 그가 탁월한 천문지리학자였다는 점도 그렇다. 2008년 김명호가 펴낸 《환재 박규수 연구》가 묻혀있는 진실을 말해 준다.

일찍이 1850년 용강현령으로 근무할 때 박규수는 용강의 위도를 측정했다. 벗 윤종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곳은 춥고 더욱이 특이한 기후라서 …겨울철이 되어 남풍이 살짝 불기라고 하면 즉시 무더위로 답답하여… 형은 이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아마도 대만과 유구로부터 곧장 이 지역까지 창해만리에 가로막힌 것이 없으므로 남풍이 한번 불면 뜨거운 기류가 흩어지지 않고 고산거령(高山巨嶺) 밖에 머물러 있다가 바람결에 순식간에 곧장 도달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형은 이런 해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이곳은 북위 39도 12분의 7도인데 이는 동짓날 측정해 본 것입니다. 한양보다 2도가량 더 높으며…읍지(邑誌) 1권을 만들고자 합니다.”
박규수는 용강읍지 편찬과 아울러 읍의 지도를 제작했다. 더 나아가 조선 전체의 지도를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동여도(東輿圖)>라 하였다. 그의 동여도는 선으로 경도와 위도의 획을 표시하고 사방 10리로 하나의 모눈을 만들어, 산천ㆍ요새ㆍ진지 등을 크든 작든 간에 모두 열거하고, 채색하여 그 강역의 넓이를 구별하였다. 상하 두 편으로 만들어 서로 연결할 수 있으며, 각각 범례가 있어 혼란스럽지 않았다. 두 권을 펼치면 8도가 되지만 도르르 말면 작은 상자 속에 가지런히 담겼다. 지금 지도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것은 사라졌다. 그 지도가 이러이러한 지도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만 전해 오는 것이다.

박규수는 용강에서 부안 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거기에서 별자리 관측에 몰입한다. 어느 날 밤 마침내 남극노인성을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아우에게 편지를 쓴다.
“이곳 부안의 위도는 한양에 비해 2도쯤 낮다. 그런즉 남극 노인성을 볼 수는 있지만, 관측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바닷가라 구름이 끼어 날씨가 맑은 저녁이 거의 없다. 대한(大寒) 날 밤 22시가 되어서야 마침내 볼 수 있었다. 크기는 북두칠성 가운데 가장 큰 별과 같았다. 색깔은 짙은 황색 내지 옅은 적색이고, 번쩍이는 광선은 없지만 밝은 한 덩이 별이 훤하게 빛났다. 지평선에서 한 길도 되지 않는 높이에 떴다가는 곧 저버렸다. 아마 험준한 언덕이나 산이 없는 곳에서 구름이 끼지 않는 날씨라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위도가 낮지만, 다행히 남쪽에 높은 산이 없으므로 보인 것이다. 이웃 고을이라 해서 곳곳마다 다 보이지는 않을 터이다. 대개 한라산 정상에서는 춘분날 밤에 그 별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지금 부안의 동헌(東軒)에서 대한 날 밤에 보게 되니 가슴이 뜀을 어이할 수 없다. 이것을 속인들에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은 믿지 않고 말들만 많아질 터이므로 쓸데없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서 박규수가 밤 10시에 발견했다는 노인성은 서양의 학명으로는 카노푸스(Canopus)다. 매우 밝은 별이지만 남극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조선 땅에서는 관측하기가 극히 어렵다고 한다. 박규수가 흥분한 까닭이다.
옥을 깎아 만든 듯한 단아한 선비 얼굴을 한 박규수가 과학자로서 조선 전도를 만들었고 천문 관측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러나 더욱 놀랄 일이 남아 있다. 매우 독창적인 지구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다음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