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소동 발상지, 우오즈(魚津)의 쌀 창고

  • 등록 2025.08.02 1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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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베3댐의 조선인강제노동현장을 찾아서 <4>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도야마현(富山県)의 후간(富岩)운하에서 이와세(岩瀬) 항구로 이동해 전망대에 올랐다. 항구에 정박한 대형 선박 안에는 중고 소형자동차가 가득 실려 있었는데, 아마도 러시아행을 준비 중인 듯했다. 도야마항 선박의 67%가 러시아행이고 도야마항이 일본의 중고자동차의 33%를 수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구 반대편으로는 넓은 바다가 펼쳐졌고, 오른쪽으로는 병풍처럼 다테야마 연봉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전망대를 내려와 동쪽 해안을 따라 약 40km를 달려 도착한 곳은 우오즈(魚津)의 쌀 창고 앞. 이곳은 1918년 ‘쌀 소동’의 발상지 중 하나로, 현재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가까이에 검고 커다란 목조 창고가 남아있다.

 

 

쌀 소동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14년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호경기를 맞았지만,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서민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특히 쌀 상인들의 사재기로 인해 쌀값은 무려 네 배까지 치솟았고, 결국 1917년 봄부터 1920년 봄까지 전국적으로 쌀 소동이 이어졌다. 주요 산업 지역인 탄광과 조선업, 대도시 등을 중심으로 임금인상 요구와 폭동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쌀값 급등이 맞물리며 사회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井本三夫編, 『쌀 소동·대전 후 데모크라시 백 주년 논집(米騒動・大戦後デモクラシー百周年論集)』(集広舍, 2019), 3쪽)

 

1918년 7월 23일, 홋카이도로 쌀을 운송하기 위해 선박이 우오즈항에 들어오자, 쌀값 상승에 시달리던 어부들의 아내 수십 명이 제12은행의 쌀 창고 앞으로 몰려가서 완곡하게 반출 중지를 호소했다. 결국 선적은 중단되었고, 이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도야마현 연안 지역 곳곳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다. 특히 8월 6일 나메리가와(滑川) 에서는 2,000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이 역시 기사화되며 전국적으로 약 백만 명에 이르는 과격한 항쟁으로 번졌다.(富山新聞社,『越中の群像-富山県百年の軌跡』, 桂書房, 1984, 162쪽)

 

결국 당시 데라우치(寺内) 내각은 총사퇴했고, 그 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쌀 소동은 이후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며, 일본 민주주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북일본신문>(2025년 6월 8일 보도)에 따르면, 우오즈시가 이 쌀 창고를 매입했다고 한다. 우오즈시는 “서민들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쌀 소동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보존계승이 필요하다.”라고 그 까닭을 밝혔다.

 

한편, 1918년 우오즈에서 시작된 쌀 소동의 불똥은 식민지 조선으로 튀었다. 따라서 일본의 쌀 소동을 조선의 1919년 3.1만세운동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본 정부는 조선으로부터의 쌀 이입을 늘려서 자국 내 쌀 부족 문제 해결하려 했다. 그 정책에 따라 조선의 쌀 생산을 늘리는 ‘산미증식계획’을 1920년부터 본격 시행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쌀 생산량은 1912년 1,156만 8천 석에서 1935년 1,671만 7천 석으로 늘었지만, 같은 기간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52만 5천 석(4.5%)에서 900만 1천 석(53.8%)으로 급증했다.

 

그 결과 조선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1912년 0.772석에서 1935년 0.380석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村上勝彦ほか,「植民地期朝鮮社会経済の統計的研究(1)」(『東京経大学会誌』第136号,1984年) 31, 34쪽, 재인용: 井本三夫編, 『쌀 소동·대전 후 데모크라시 백 주년 논집(米騒動・大戦後デモクラシー百周年論集)』(集広舍, 2019), 49쪽)

 

 

 

여기에서 ‘조선 쌀의 일본으로의 강제 이동’을 ‘수출’이라고 표현한 것은 조선을 일본 본토와 다른 식민지 경제 구조로 보았기 때문인데, 결국 조선 농민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가지 않는 ‘수탈’을 의미한다.

 

1918년 일본의 쌀 소동은 일본에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쌀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대외적 노력을 끌어냈다. 따라서 일본의 쌀 소동 발상지를 보면서 일본인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에 따라 식민지였던 조선은 쌀을 수탈당하여 굶주렸음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류리수 기자 ristina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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