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의 새 발자국

  • 등록 2025.12.10 11: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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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을 보면서 매일이 '애일'이 되도록 하자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331]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첫눈이 기상예보대로 왔다. "저녁 6시에 대설경보입니다. 8시까지 5~10센티가 내리는 곳도 있겠습니다." 뭐 이런 내용인데 저녁 6시가 되니 정말 놀랍게도 눈이 내린다. 그것도 싸라기눈이 아니라 작은 아기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어깨로, 머리로 내려 곧 행인들을 할아버지로 만든다. 거리에 눈이 쌓이고 차량들이 엉금엉금. 사람들은 조심조심...

 

도시에는 그렇게 눈이 내렸고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조용히 소복소복 눈이 내렸다. 눈앞의 창틀에서부터 건너편 아파트 집과 창문, 그 옆의 나무들이 차례로 옷을 갈아입는다. 아이들의 놀이터 놀이기구도 눈을 뒤집어쓴다, 올겨울 첫눈으로는 너무도 황공할 정도로 깨끗한 세계를 만들어준다. 모든 먼지를 덮는 것은 물론 세속이익을 위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씻어주고 덮어준다.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敍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 가면 최초의 강설(强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만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

                                                                               ...... 김진섭(金晋燮) <백설부(白雪賦)>

 

 

한(漢) 나라 양효왕(梁孝王, 문제(文帝)의 아들)이 크고 화려한 정원을 만든 뒤, 이름난 문인들을 불러 잔치하는데 당시 이름을 날리던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도 손님으로 끼었다. 잔치하는 중에 눈이 쏟아지자, 사마상여에게 부(賦)를 지어달라고 해서 이날을 기념했다는데 이런 전설을 담은 남조 송(南朝宋) 사혜련(謝惠連, 397~433)의 〈설부(雪賦)〉에 보면 갑자기 흰 눈이 내리는데 ​

 

그 기세를 보니, 흩어지고 모이며 뒤섞이고, 바람을 따라 엎드렸다 일어섰다 하고, 때로는 모이고 때로는 흩어지며, 오고 가기를 거듭한다. 허공은 희디희고, 천 리의 들판이 아득하다. 밝기는 태양 빛이 비치는 듯 하늘가에 번지고, 쏟아지는 모습은 흰 물결이 흔들리며 허공을 떠다니는 듯하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우니, 사방이 온통 백색이다. 잠시 뒤 바람이 잠잠해지고, 갠 날씨에 맑은 빛이 드러난다. 이때 흰빛은 두텁게 쌓이고, 한겨울의 음영 속에 아득한 경치가 펼쳐진다. 눈의 흰빛이 순수한 해묵은 경치 속으로 스며들고, 빽빽한 기세는 차디찬 얼음에서 뿜어나온다. 이윽고 날씨가 개고 햇빛이 맑아지며, 구름이 흩어져 하늘이 깨끗해진다. 강과 산은 새 모습이 되고, 초목은 모두 눌려 형태를 잃는다.

                                                                                                   ...... 사혜련(謝惠連) 〈설부(雪賦)〉

 

라고 묘사한다. 과연 필설이 짧은 우리들은 따라가지 못할 솜씨다.

 

아침이 되어 눈 쌓인 길을 걷다 보니 흰 눈 위에 작은 단풍나무 잎이 조금 마른 채로 살짝 얹혀있다. 갑자기 겨울이 되어 미처 떨어지지 못한 것들이 눈마저 내리니 그 위에 떨어지고 바람에 쓸리는 것이리라. 단풍나무 잎이 마치 새의 발자국 같다. 눈 위에 찍힌 새 발자국이라니 시간의 덧없음을 노래한 바로 그 유명한 '설니홍조(雪泥鴻瓜)'가 이것인가?

 

 

 

人生到處知何似 인생은 도처에서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應似飛鴻踏雪泥 날아간 기러기가 진흙 눈을 밟은 것과 같으리

雪上偶然留指爪 진흙 눈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더라도

鴻飛那復計東西 그 기러기 동으로 갔는지 서로 갔는지 어찌 알랴.”

 

송나라 소동파(蘇東坡, 1037~1101)가 그의 아우 소철(蘇轍, 1039~1112)에게 준 시에서 만들어진 성어라는데 '눈 위에 진흙으로 찍힌 기러기의 발자국'이란 뜻이다, 전체의 뜻은 원래 기러기들은 눈 위에 진흙으로 발자국을 찍어 놓고 그것을 보고 그다음 해에 다시 오려고 한다는데, 어느새 눈이 녹아 발자국도 없어지고, 발자국을 찍은 새로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아무것도 없다는, 시간이 덧없고 인생이 허망함을 의미하는 성어란다. 흰 눈 위에 떨어진 아기 단풍을 보며 불현듯 그런 덧없는 기러기 발자국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눈은 어찌 보면 참 허망하기도 하다. 한겨울 아주 심한 추위가 이어지면 눈이 금방 녹지는 않겠지만 이번에 내린 눈 같으면 해가 나면서 곧 녹아내리기에 눈 위에 발자국을 찍은 그동안의 모든 흔적이 정말로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마니 말이다, 곧 저 아기 단풍도 눈 녹은 물에 휩쓸려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다.

 

과거시험에서 할아버지를 비난한 글을 썼다가 평생 이를 괴로워하며 떠돌이 생활을 한 싯갓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스산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늘 하느님도 땅의 임금도 돌아가셨나

모든 산마다 수많은 나무들이 하얀 눈 소복을 입었구나​

 

내일 낮에 태양더러 조문 오게 한다면

집집마다 처마끝에

고드름 눈물 뚜뚝 떨어지리라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明日若使陽來弔 家家檐前淚滴滴

                                              ......김병연, <눈(雪)>

 

 

세상이 하얀 도화지가 되도록 덮어버린 눈을 사람들은 서설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번 눈도 그런 의미에서 서설이다. 모든 것을 덮고 새로 시작하자는 하늘의 너른 마음의 표현이다.

 

일 년 내내

떨어진 일력 매수만큼이나

지울 수 없이

 

크고

많은

배설물 덩어리로 더럽혀 놓은 것을

 

괜찮다 하며

덮어 두라 하시네

오물로 찍어 놓은 발자국

 

미리 알고

흰 눈으로 덮어두니

염려하거나

뒤돌아보지 말라 하시네

 

이제부터는

깨끗한 발로

꼭꼭 자국 내어

걸어보라 하시네

                          ...... 정재영, <서설(瑞雪)>

 

올해 초봄이 왔다고 좋아하던 우리들, 어느새 여름을 지나고 가을인가 했더니 겨울이고, 겨울인가 했더니 곧 큰 눈이 내린다. 그만큼 올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갔다. 늘 연말에 후회하듯이 "올해 무엇을 했나....?"라고 해 보지만 그동안 하려고 했던 것, 했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눈 위의 새발자국처럼 아득히 멀어지거나 아예 기억에서도 묻힐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망연자실할 것인가?

 

어느새 가을소리가 높아지다니 / 秋聲忽已高

세월이 망아지 틈 지나듯하네 / 日月驚隙駒

사람 일이란 참으로 속절없는 것 / 人事信奄忽

세상은 틀림없는 여관인가 봐 / 世界眞逆廬

                                        ...... 윤휴, <심 승지 광수의 죽음을 애도함(挽沈承旨 光洙) >

 

사실은 시간도 머물 때가 있단다. 누구를 사랑할

때에만 시간이 서 있어 준단다. ​

 

사랑하는 동안은

묵묵히 흐르는 유구한 시간도 발을 멈추고

사랑, 그 옆에서 기다려주곤 합니다.​

 

덧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허무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무정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잔인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속절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사랑 옆에선 발을 멈추고

시간이 중단된 우주를 마련해 주곤 합니다.

언제까지나,

                                               ....... 조병화. <시간>

 

아직도 우리는 사랑할 시간이 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 마음을 되찾으면 우리들의 허망한 시간도 천천히 가줄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연말 우리들의 마음이 허전한 것은 이 사회 곳곳에서 그런 아집을 여전히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간

사랑이 지나가면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의 속도,​

 

아, 그러한 세월의 길을, 사람은

인생이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절없이

                                   ...... 조병화. <시간>

 

 

누군가가 말했다. "늦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빠른 것이다."

 

그렇다 우리 생각을 바꾸고 이 사회를 위해 의욕은 유지하되 아집과 욕심은 버리고 저 푸른 하늘처럼 맑은 마음으로 매일을 사랑하자. 농암 이현보는 돌아가실 집안 어른의 매일매일이 소중하다며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애일(愛日)이란 말을 썼는데 우리도 매일매일 사랑을 지키고 실천한다는 뜻에서 매일이 '애일'이 되도록 하자. 그러한 결심을 이 한해가 다가는 시점에 흰 눈을 보면서 다시 해보자.

 

이동식 인문탐험가 sunonthe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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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인문탐험가

전 KBS 해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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