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돌]되찾은 '나라', 되찾지 못한 '말'(4)

  • 등록 2025.08.20 12: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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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새겨진 식민의 그림자들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해마다 맞는 8월 15일.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되새기는 그날, 우리는 모든 것을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땅, 그 땅의 이름은 제대로 된 광복을 맞았습니까?

 

인천광역시 시민들에게 이 고장의 옛 이름이 무엇인지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다들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적 있는 그 이름은 '미추홀(彌鄒忽)'입니다. 비류가 나라를 세웠다는 전설이 깃든 이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 대신  '어질 인(仁)'에 '내 천(川)'을 쓰는 한자 이름, '인천(仁川)'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인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국 220여 개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토박이말로 된 이름을 간직한 곳은 '서울'과 '임실' 단 두 곳뿐이라는 통계는, 우리 땅이 겪고 있는 '언어적 식민상태'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 줍니다. 

 

 

오래된 상처 위에 박힌 식민의 쐐기

 

우리말 땅이름의 수난은 두 차례의 큰 역사적 변화를 거치며 깊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신라 경덕왕 때의 '한화(漢化) 정책'입니다. 경덕왕은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이룩하고자, 지역 토호 세력의 영향력이 깃든 토박이말로 된 땅이름을 중국식 두 글자 한자 이름으로 모두 바꿨습니다. 이 때 '물골'이라는 뜻의 '매홀(買忽)'이 '수성군(水城郡, 수원)', '크고 높은 벌판'이라는 뜻의 달구벌(達句伐)'이 '대구현(大丘縣, 대구)'이 되었습니다. 이는 국가 발전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그 일의 열매(결과)로 지배층의 문자인 한자가 일반 백성의 삶이 녹아있는 토박이말을 밀어내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오래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겨레의 얼을 빼앗으려 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의 '식민 통치'였습니다. 1910년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는 '쐐기'로 우리 땅이름을 겨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14년 이뤄진 '부군면 통폐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우리 토박이말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넓은 밭을 뜻하던 '한밭'은 그대로 한자로 옮긴 '대전(大田)'으로,
쇠(鐵)가 나는 벌판이라는 뜻의 '쇠벌'은 '김천(金泉)'으로,
밤나무가 많은 골짜기였던 '밤나뭇골'은 '율리(栗里)'로,
땅의 색이 검붉었던 '흙기미'는 '흑석동(黑石洞)'으로.

 

땅의 특징과 이야기가 담긴 생명력 넘치는 우리말은 버려야 할 것으로 여겨졌고, 그 자리를 뜻도 알기 어려운 한자어가 차지했습니다.

 

'미추홀'의 되살아남, 그리고 이름에 담긴 비밀

 

다행스럽게도 '미추홀'이라는 이름은 오롯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2018년, 인천광역시 남구가 '미추홀구(區)'로 이름을 바꾸면서, 천년의 역사를 품은 이름이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땅이름 되찾기의 좋은 본보기이자, 다른 지역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그렇다면 '미추홀'은 과연 어떤 뜻을 품고 있을까요?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옛날 땅이름은 소리 나는 대로 한자를 빌려 적는 '차자(借字) 표기'이기에 그 본디꼴을 어림할 뿐입니다. '물이 많은 고을(물골)', '거친 갯벌이 있는 고을(미수골)', '산 아랫마을(멧골)' 등 여러 가지 풀이가 있다는 것이, 우리말 땅이름이 품고 있는 풍부한 역사 문화적 가치를 보여줍니다.

 

몸은 찾았지만이름은 되찾지 못한 땅

 

나라를 빼앗긴 뒤 일제가 억지로 시킨 '창씨개명'을 목숨을 바쳐 가며 안 하신 분들도 계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찾은 뒤, 우리는 일제가 강요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본래의 성과 이름을 되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낱사람(개인) 이름은 되찾으려 그토록 애썼으면서, 우리 모두의 터전인 땅의 이름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잃는 것은 그저 부르는 말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쇠들'라는 이름 속에는 그곳의 산업사적 정보가, '한밭'에는 그 지역의 지리적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을 잃는 것은 곧 그 땅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언어적 풍요로움을 잃는 것입니다. 한자로 된 이름은 그저 행정적 기호일 뿐, 우리 조상들의 삶의 숨결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땅이름을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땅이름의 빛찾음(광복)'을 위한 풀수(해법)]

 

말할 것도 없이 수십 해 동안 써 온 이름을 바꾸는 데에는 많은 돈이 들고 사회적 혼란이 따를 것이라는 걱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더 큰 가치인 '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한 돈이며,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1. '옛 땅이름 되찾기 국가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역사학자, 국어학자, 지리학자, 그리고 지역의 역사를 기억하는 향토사학자와 어르신들이 참여하는 범국가적 기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2.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실태 조사를 해야 합니다. 옛 땅이름을 찾는 일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대동여지도』 같은 옛날 지도나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날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제강점기에 만든 정밀 지도에 바뀌기 앞뒤의 땅이름이 적혀 있어 중요한 쓸모가 많습니다. 또한 각 지역 면사무소에서 펴낸 면지(面誌)에는 주민들의 삶과 함께 기록된 옛 마을 이름과 땅이름이 잘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문헌 자료와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구전(口傳) 자료를 모아 갈무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함안군의 사회적협동조합 '아시랑'이 펴낸 『함안군 우리마을 땅이름』과 같은 민간이 앞장서서 이뤄 낸 좋은 보기를 본보기 삼아, 정부와 지역 공동체가 힘을 모아 해 나가야 합니다.

 

3. 우리 토박이말 이름 먼저 쓰기를 해야 합니다. 행정에서 쓰는 땅이름을 바로 바꾸기 어렵다면, 현재 쓰는 이름 앞에 토박이말 이름을 함께 붙여 부르고 쓰는 운동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도로 표지판과 공공기관 명패, 공식 문서에 '한밭 대전', '빛고을 광주', '달구벌 대구', '미리벌 밀양' 과 같이 토박이말 이름을 앞세워 적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저절로 토박이말 이름과 가까워지고 그 가치를 깨닫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4.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과 이어져야 합니다. 찾아 낸 옛 땅이름과 그 말밑(유래)을 초중고 교과서에 싣고, 고장마다 특색 있는 '땅이름 이야기'를 교육 자료로 만들어 미래 세대가 우리 땅과 땅이름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땅의 이름을 되찾는 것은 지난날로 되돌아가는 것(과거로의 퇴행)이 아닙니다. 이는 식민주의가 남긴 상처를 낫게하고, 끊어진 역사를 바로 잇는 앞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라 찾은 날 여든 돌'을 맞는 우리는 이제 총칼에 빼앗겼던 땅뿐만 아니라, 그 땅에 새겨진 우리의 이름과 얼까지 오롯이 되찾는 '땅이름 되찾음(광복)'을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입니다. 

 

 

이창수 기자 baedalmalji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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