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모든 게 달라진다

  • 등록 2025.08.24 10: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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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규, 《걷는 이의 축복 코리아둘레길》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9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한성수 조각가가 저에게 이화규 씨가 쓴 책 《걷는 이의 축복 코리아둘레길》을 보내주셨습니다. 내가 걷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한 작가님이 저자의 친필 사인까지 받아 저에게 선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친필사인에서 “Ultreia et Suseia”라고 썼네요.

 

 

“Ultreia et Suseia(울트레이아에뜨수세이야)”는 중세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순례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전통적 인사말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Ultreia는 "더 멀리!" 또는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뜻으로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라는 격려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Suseia는 "더 높이!"라는 의미로,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자는 뜻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마주치는 한 사람이 “Ultreia!”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이 "Et Suseia!"라고 응답하면서 서로를 격려한다고 합니다. 이 문구를 보니, 저도 예전에 히말라야 트레킹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끼리 서로 “나마스테”하며 인사하던 것이 생각나네요. “나마(nama)는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고, ”테(te)"는 당신에게라는 뜻이지요.

 

‘코리아둘레길’이라고 하면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대충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라고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예! 먼저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따라가는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이 개통되었는데, 그 뒤 휴전선을 따라가는 DMZ 평화의 길이 뚫림으로써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된 것이지요.

 

책 표지에는 ‘코리아둘레길 4,520km 전 구간 개통 기념판’이라고 쓰여있는데, 저자는 코리아둘레길을 전부 다 돌아보고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사인해 준 표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물론 전 세계 유명한 길도 다 걸어본 사람입니다. 와! 대단하네요! 걷기를 좋아하는 저에게는 저자는 넙죽 절하고 사부로 모셔야 할 분이네요.

 

이 책은 코리아둘레길 전부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그중 DMZ 평화의 길과 경기둘레길을 걸으며 쓴 글을 모은 것입니다. 둘레길이 인기를 끌면서 지자체마다 둘레길 만드는 것을 열심히 하였는데, 경기도도 경기둘레길을 만들었군요. 제주도와 서울에 이어 경기도도 경기도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을 만들었으면, 다른 도에서도 이런 둘레길이 나올 법하겠습니다.

 

저자는 고대 국문학과를 나오고 동 대학원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둘레길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글에는 인문학적 향기가 서려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을 하였기에 글마다 시 한 편씩을, 또 한문학을 하여서 고전 명구를 인용합니다. 이를테면 <안개 속에 산화한 군인들, 그리고 인제 사람 박인환>이라는 글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 속에서>를 인용합니다.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이여,

덩굴과 돌들 모두 외롭고,

이 나무는 저 나무를 보지 못하니

모두가 다 혼자로구나!

나의 삶이 밝았던 때에는

세상엔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 여기 자욱한 안개 내리니

아무도 더는 볼 수 없어라.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이여,

산다는 것은 외로운 것,

누구도 다른 사람 알지 못하고

모두는 다 혼자인 것을!

 

그리고 경기둘레길 안성 들판을 걸으며 쓴 글 <천변을 따라 그리고 강변을 따라>에서는 《회남자》 원도훈(原道訓) 편에 나오는 문구 ‘토처하부쟁고(土處下不爭高) 수하류부쟁선(水下流不爭先)’를 인용합니다. ‘땅은 아래에 있어도 높이를 다투지 않고, 물은 아래로 흐르며 앞서고자 다투지 않는다’라는 뜻이지요.

 

이 글에서 저자는 또한 책상 앞 똑똑이보다 걸어 다니는 머저리가 단연코 낫다고 합니다. 이 문구는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오랜 걷기에서 깨달은 인생 지혜 같습니다. 저자는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떨어진 활자들을 수습하고 인용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마트텔레비전 앞에서 리모컨으로 여러 채널을 전전하며 최신 소식을 종합하느라 애쓰고, 유튜브 등 자극적인 영상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리모컨을 돌리고 돌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 얻는 지식은 깨닫거나 배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선입견을 다지는 수단이 되기 쉽다. 내 생각은 사라지고 확증편향적으로 남이 내뱉은 말을 정신없이 긁어모은다. SNS 발달로 사고의 양극화는 심해진다. 친구 맺기, 팔로잉, 알고리즘이 가세하여 프레임이 단단해지고 생각은 획일화된다. 결국 이런 상황이 가속되면 다양성이란 설 자리를 잃는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 격한 공감으로 연필로 굵게 밑줄을 치고, 또 중요 표시까지 해두었습니다. 저도 요즘 사람들이 생각이 굳어져 남을 인정치 않고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거든요. 저자는 소로우(H. D. Thoreau)가 이런 현상을 ‘뇌 썩음(brain-rot)'라고 했다는데, 우리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서 이러한 ’뇌 썩음‘ 현상을 보지 않습니까?

 

또한 저자는 길을 걸으면서 그때그때 떠오른 음악도 글 끝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 일부도 적어두었고, 정보무늬(큐알코드)를 넣어두어 우리가 정보무늬에 슬기말틀(스마트폰) 사진기를 들이대면 그 음악을 들을 수도 있게 해놓았습니다. 문학도인 저자는 청년기까지 1960~1970년대의 영미 대중음악을 섭렵했고, 사회생활 중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을 즐겨 들었다네요. 그래서 한때는 오디오 평론가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저는 저자가 적어놓은 가사를 보면서, 대중가요에도 시 못지않게 아름다운 가사가 많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보통 때는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서 음악에 먼저 집중하다 보니, 가사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중에 <편의점 커피 한잔의 묵상>이란 글의 끝부분에 올려있는 정미조가 부른 노래 <귀로>의 가사를 여기에 인용해 봅니다.

 

어린 꿈이 놀던 들판을 지나

아지랑이 피던 동산을 넘어

나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네

멀리 돌고 돌아 그곳에

담벼락에 기대 울던 작은 아이

어느 시간 속에 숨어버렸는지

나 그곳에 조용히 돌아가

그 어린 꿈을 만나려나

 

무지개가 뜨는 언덕을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 다녔네

그 무지개 어디로 사라지고

높던 해는 기울어가네

새털구름 머문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서

나 그리운 그곳에 간다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어떻습니까? 한 편의 시 같지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처음에는 시에다가 곡을 붙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이주엽이란 작사가가 지은 가사라네요. 이 곡은 정미조 씨가 오랜 공백을 딛고 발표한 앨범 <37년>의 표제곡인데, 정미조 씨는 꼭 자기 얘기 같아 여러 번 목이 멨다고 합니다. 아래에 정보무늬에 들어있는 유튜브 주소를 올리오니 한 번 들어보시지요.

 

<귀로> 노래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0ulnpnouVA&list=RD-0ulnpnouVA&start_radio=1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며 끄덕끄덕한 부분이 많은데, 그 가운데 자전거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는 한동안 자전거를 타다가 곧 포기했습니다. 바퀴 위에 올라타니, 그 속도로 인해 풀과 나무, 하늘과 구름을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답니다. 자동차에 견주면 자전거는 훨씬 느린 것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 속도로도 또 자전거를 조종해야 하니까 주위 자연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요.

 

저는 이러한 까닭 말고도 사진 찍는 것 때문에 자전거를 못 타겠더군요. 저는 집이 잠수교 근처라 자전거 타고 한강 상류로 하류로 나가보고, 또 중랑천을 따라 의정부까지도 가보고, 자전거 애호가라면 다 가보았을 하트 코스도 – 한강, 탄천, 양재천, 학의천, 안양천을 따라 한 바퀴 도는 하트 모양의 길 – 돌아보았는데, 늘 이런 것 때문에 갈등을 겪다가 페달 밟는 것을 멈추었지요.

 

걷기를 좋아하는 제가 걷기 고수의 책을 만나니 말이 많아졌네요.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 한마디를 인용하면서 제 글을 마치렵니다. 왜 한사코 그렇게 걷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입니다. 고수의 말을 들으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기의 대열에 합류하는 동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디 상처 입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있겠는가. 걷기란 내게 삶의 상처를 잊고, 창의적이고 입체적인 생각을 끌어내기 위한 과정이다. 멈춰 있으면 생각이 죽고 삶의 상처만 도드라진다. 걸으면 모든 게 달라진다.”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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