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가도 가도 왕십리’라는 말이 있지요? 글자 그대로의 뜻은 왕십리가 워낙 넓어 가도 가도 아직도 왕십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일 것 같습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 왕십리란 한양 도성 동쪽 바깥쪽으로 십 리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말하였습니다.
‘성저십리(城底十里)’란 말이 있는데, 한양 도성 바깥으로 10리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저십리는 한양도성을 둘러싼 10리나 되는 넓은 지역을 말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에서 동쪽의 성저십리를 왕십리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외(城外)’라고 하지 않고 ‘성저(城底)’라고 하는 데서,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성 바깥 지역을 깔보는 심리가 들어간 것처럼 느껴지네요.
김소월의 시 <왕십리>에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라는 표현이 있지요? 시인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의 무력감도 표현한 것 같은데, 그래서 ‘가도 가도 왕십리’는 지리적으로 넓다는 뜻 말고도 삶의 지루함이나 계속 노력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무력감, 허탈함 등을 표현할 때도 쓰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에서는 ‘왕십리’가 다른 의미로 쓰이지요? 조선 초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왕십리에 이르렀을 때, 한 촌로가 나타나 “이곳에서 십 리를 더 가라”고 하여 ‘왕십리(往十里)’라고 했다고요. 도선대사가 촌로의 모습으로 나타나 한양 도읍지를 점지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실은 고교 동기 김창희가 《가도 가도 왕십리(푸른역사)》라는 책을 냈기에, 이를 읽은 소감을 쓰려는 것이 제목부터 할 말이 많아 서론이 길어졌네요. 창희는 왕십리 출신의 인물, 이곳을 거쳐 간 인물 등 왕십리에 흔적을 남긴 인물들 이야기를 썼습니다. 창희는 처음에는 왕십리에 쓸만한 인물이 얼마나 있을까 하였다는데, 그렇지만 파면 팔수록 계속 이야기가 샘솟아 이런 의미에서도 ‘가도 가도 왕십리’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창희의 얘기를 들어보지요.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곳이 왕십리다. 예전엔 그런 줄 미처 몰랐다. 내세울 만한 변변한 역사와 인물이 없는, 그저 그런 변두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갈래를 특정하기 힘든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들이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한 발짝 더 멀리 뛰어 달아나며 그 너른 폭과 깊이를 보여 주는 곳이 왕십리였다.”
그런데 ‘왕십리’ 하면 그다음에 연상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똥파리’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예전에 왕십리는 서울 도성에 공급하는 채소의 주요 공급지였지요. 예전에는 이런 채소를 기르기 위한 비료로 똥을 많이 쓰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왕십리에는 똥을 모아두는 큰 똥구덩이가 많았고, 그런 똥구덩이에는 파리가 몰려듭니다.
‘똥구덩이’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저는 어렸을 때 한남동에 살았습니다. 당시 한남동 저지대는 주로 논밭이었고, 그러다 보니 군데군데 똥구덩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여름날 잠자리채를 들고 잠자리를 쫓다가 그만 발밑을 보지 못하고 똥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작은 똥구덩이라 허벅지까지만 빠졌지만, 후유~ 그놈의 똥 냄새는 씻어도 씻어도 금방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왕십리 채소 얘기를 하니까,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조선 시대 왕십리 채소를 도성으로 운반하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동대문을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마포에 부려지는 수산물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남대문을 향하여 갑니다. 그렇게 계속 다니다 보면 햇빛에 왕십리에서 오는 사람들은 목덜미가 타고, 마포에서 오는 사람들은 앞이마가 탑니다. 그래서 얼굴에 탄 부위를 보고 왕십리 상인인지, 마포 상인인지 알 수 있었다나요.
똥파리 얘기하다가 얘기가 곁가지로 흘렀는데, 일제강점기에 동대문과 뚝섬 사이를 왕래하던 기동차(궤도전차에 오물 운반용으로 별도 편성)가 왕십리를 지나면서는 똥파리들을 잔뜩 묻혀 서울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왕십리 똥파리’라는 표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왕십리 똥파리’에서 연상되듯 왕십리는 역사에 이름 석 자 제대로 남긴 인물보다는 주로 민중들이 살던 곳입니다. 창희도 이 책에서 그런 민중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답니다. 이것도 창희의 얘기를 들어보지요.
“우리가 저잣거리에서 흔히 마주치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경우에 따라선 당대의 천덕꾸러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주로 이곳 왕십리에 살거나 흔적을 남겼다.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런 민중의 이야기다.”
창희는 이 책에 ‘현대 택견의 개척자 신한승’으로부터 ‘난세의 공신 이경직’까지 13편의 인물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13명의 대표적 인물을 각 편의 제목으로 달았지만, 거기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과 처음 들어가는 글에 나오는 정약용과 이건창까지 하면 모두 22명의 인물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습니다. 정약용과 이건창은 광희문 밖으로 나서서 길을 가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시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신한승(1928~1987)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이경직(1577~1640) 이야기로 끝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창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인물 탐구를 합니다. 이런 인물 배치에 대해 창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왕십리에서 어느 시대까지 되짚어갈 수 있을지 한번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왕십리 장소성의 원형’을 추적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창희는 이 책에서 실제 역사에 나오는 인물 이야기도 실었지만, 실제 인물이 아닌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도 실었습니다. 5편의 ‘1920년대 막노동자 진 서방‘은 이효석의 처녀작 <도시의 유령>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진 서방은 동대문과 광희문 밖의 청계천 주변에서 쳇바퀴 돌 듯이 일하고, 먹고 마시며, 잠을 자는 날품팔이 일꾼으로 왕십리와 인연을 맺고 있기에, 이 책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진 서방은 술 한잔 걸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동묘 안으로 들어갔다가 유령을 만나는데, 먼저와 잠을 자고 있던 거지를 유령으로 오인하지요. 창희는 진 서방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진 서방이 거쳐 간 곳이 지금의 어디인지 꼼꼼하게 알려줍니다.
또 하나는 10편에 나오는 염동이와 채생입니다. 염동이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19세 중반의 야담집 《기관(奇觀)》에 나오는 인물이고, 채생은 김안로(1481~1537)가 지은 《용천담적기》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염동이와 채생이 청계천변에서 도깨비를 만난 이야기인데, 창희는 <한양도성도>라는 옛 지도까지 펼쳐놓고, 이들이 도깨비 만나 놀던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을 짚어가며 설명합니다.
그리고 12편에서는 똥장수 예덕선생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연암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에 나오는 엄행수 이야기입니다. 박지원의 친구 이덕무에게는 신분이 낮지만 친하게 지내는 ‘엄행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박지원은 엄행수에 관한 이야기를 《예덕선생전》이라는 풍자소설로 썼습니다. 박지원은 엄행수가 ‘더러움[예(穢)]’ 속에서 자신의 ‘덕(德)’을 찾는 사람이라 ‘예덕선생’이라는 호칭을 받을 만하다고 합니다. 당시의 고루한 양반 관념에 구애받지 않던 연암 선생답습니다.
18세기에 똥장수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왕십리가 상업적인 채소 재배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비료로 똥이 많이 필요하니, 똥을 모아다가 파는 직업이 생긴 것입니다. 창희는 예덕선생 이야기를 쓰면서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 새 시대를 개척한 영웅의 탄생설화 비슷한 울림을 받았다고 하네요.
왕십리와 인연을 맺은 인물 가운데 8편의 창덕궁 무수리 고대수에 관해서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창희는 글 제목에서 고대수에게 ‘청무밭에서 스러진 혁명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네요. 고대수는 무수리의 별명입니다. 궁중의 액막이로 뽑혀 입궐한 천한 무수리라 이름은 모릅니다. 그녀는 키가 너무 커서 바지랑대(빨랫줄을 받치는 장대)에 옷을 입혀 놓은 것 같고, 여자로서 아름다운 자태는 전혀 없었답니다. 그래서 수호지의 양산박 108명 호걸 가운데 나오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장부 고대수를 그녀의 별명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수가 어떻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고향 여주를 거쳐 장호원으로 피신할 때, 어떤 계기에서인지 그 무수리가 지근거리에서 명성황후를 보필함으로써 고대수라는 호칭을 얻게 된 듯합니다.
고대수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김옥균을 도와줍니다. 고대수가 화약을 대통에 넣어 가지고 있다가 이를 터뜨렸을 때, 이를 신호로 김옥균은 통명전에 불을 붙이며 거사를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다 아시다시피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수는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가 하였으나, 1년 2개월 뒤 체포됩니다. 원로 여기자 최은희는 자신의 책에서 고대수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가 육모전 거리(종로)를 지날 때 길에서 구경하던 여인들이 달려들어 할퀴고 쥐어뜯어 옷이 발기발기 찢어졌다. 상여가 빠져나가는 수구문(광희문)을 벗어날 때는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앞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치마폭이 떨어져 나갔다. 왕십리 청무밭 쯤에서는 잔인한 여인들이 빗발치듯 돌멩이를 던져 골이 깨지고 뼈가 부서지 유혈이 낭자하여 그대로 숨져버렸다.”
고대수는 죽어가는 순간 왕십리와 인연을 맺었군요.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창희가 청무밭에서 스러진 혁명가라고 제목을 달만 합니다. 이 밖에도 고교 동기 이진성의 증조할아버지 이성문, 코리아를 사랑한 푸른 눈의 여인 엘리자베스 키스라든가 광복 뒤 왕십리에서 선거로 맞대결한 독립운동가 지청천과 김붕준 등의 이야기가 자꾸 제 손가락을 꿈질거리게 하는데,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으니 여기서 멈춰야겠네요.
‘가도 가도 왕십리’라고 하였으니, 아마 앞으로도 창희에게 내 이야기도 알려달라는 인물들이 계속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 내에 《가도 가도 왕십리》』 2편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창희야! 계속 왕십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내느라고 수고 많았다. 덕분에 독자들은 왕십리와 인연 맺은 인물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발자국이 담긴 왕십리 지역의 이곳저곳을 알게 되었구나. 이런 민중들의 이야기를 발굴해 낸 창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앞으로도 독자들을 위해 구수한 이야기 계속 들려주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