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저의 유년 시절은 시골에 묻혀있습니다.
한겨울 고요한 침묵 속에 눈이 참으로 많이도 내렸습니다.
요란하게 내리는 비와는 달리 경건한 침묵 속에 소담스럽게 내린 눈….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이 닿지 않는 이곳에는,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 고요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마을 전체가 하얀 솜이불을 덮은 듯,
지붕 위에도, 들판 위에도,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도 눈꽃이 피어났습니다.
새벽의 햇살이 눈밭에 닿으면, 눈가루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눈부신 은세계가 펼쳐집니다. 길게 늘어진 산그림자가 하얀 들판 위에 푸른 빛을 드리우며 명암을 더합니다. 언뜻 보기에 모든 것이 잠든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삶의 작은 흔적들이 고요 속에 숨어 있습니다. 지붕 처마 밑에 길게 매달린 투명한 고드름은 겨울이 새겨 놓은 정교한 조각품이고 이따금 낯선 이를 보고 짓는 견공들의 소리만이 마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립니다.
시골집 굴뚝에는 새벽부터 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곧게 솟아오릅니다. 그 연기는 이 추운 계절에도 집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가족의 삶을 이야기해 주는 듯합니다. 언 땅을 녹이고 언 몸을 녹일 그 온기가 보는 이의 마음마저 포근하게 감쌉니다.
시골의 겨울 풍경은 어김없이 코끝이 시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때는 겨울이 이렇게 길고 혹독했나 싶을 정도로 추웠습니다.
마당에서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올 때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던 기억부터
부뚜막 위에 올려져 따뜻하게 온기를 머금었던 털신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던 장독대의 풍경…. 풍경들….
해가 중천에 뜨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언덕배기로 모였습니다.
꽁꽁 언 논바닥이나 비탈길은 최고의 놀이터였죠.
나무막대에 널빤지를 덧댄 조악한 썰매를 타고 놀았던 짜릿함
얼굴에 부딪히던 차가운 바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눈 쌓인 날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신나는 눈싸움을 벌였죠.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먹던 겨울 고구마의 맛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의 시골 겨울은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함께 나누던 따뜻함과 순수한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고요하고 하얀 눈밭 위를 걷고, 땀을 흘려가며 놀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가족의 사랑을 느끼던 시간은,
저의 마음속에 가장 소중한 보물로 남아있습니다.
도시의 생활 속에 느낄 수 없는 아련한 감정들이죠.
우린 이미 커버린 삶의 모습 속에서
유년 시절의 순진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