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시사 합작시 57. 광야(曠野)

  • 등록 2026.01.18 11: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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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 야 (曠野)

 

   백마 탄 초인은 언제 오는가 (돌)

   분토된 땅 초인 올 자리 있나 (초)

   초인이 와도 볼 눈이나 있나 (심)

   눈 내리는 광야 텅빈 그곳에 (달)

                            ... 25.1.16. 불한시사 합작시

 

 

 

 

 

이 시를 새해의 문턱에서 읽을 때, 자연스레 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넓은 대륙을 가르며 달리던 북방 민족의 말들, 눈 덮인 초원을 바람처럼 질주하던 생명의 리듬. 말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태도였다. 멈추지 않음, 주저하지 않음, 방향을 몸으로 아는 감각. 말 위에 올라탄 인간은 사유 이전에 결단을 배웠고, 말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광야를 광야로 견딜 수 있었다.

 

올해가 붉은 말의 해라는 사실은 상징적으로 깊다. 붉음은 생의 기운이며, 피와 열정, 저항의 색이다. 북방 기마 민족의 기상은 단순한 정복의 기억이 아니라, 광야에서 스스로 잃지 않기 위한 긴장과 절제의 역사였다. 그 기상에 대한 그리움은 과거 회귀가 아니라, 오늘의 삶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땅에 붙잡혀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이육사의 시 "광야"가 떠오른다. 이육사의 "광야"는 자연 풍경이 아니라 정신의 지형이다. 그 광야에는 길이 없고, 이정표도 없으며, 다만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한 기다림만이 남아 있다. 이 초인은 니체적 의미의 초인을 그대로 옮겨온 존재가 아니다. 이육사의 초인은 민족의 절망을 껴안고도 무너지지 않는 정신의 형상이며, 시대의 폭력 앞에서도 자기 언어를 잃지 않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이육사에게 초인은 영웅이기보다 증거다. 인간이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 시가 총칼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증거, 그리고 광야가 끝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래서 그의 광야는 비극적이면서도 단호하다. 거기에는 울부짖음보다 침묵이 많고, 선동보다 결기가 깊다. 그래서 언젠가 돌아가야 할 텅빈 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합작시는 지난해 1월 16일, 이육사 시인이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바로 그날에 썼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꼭 1년 되는 그날 북경 공항에 내렸으니, 우연이면서도 필연처럼 다가온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눈이 내릴 듯 흐린 공기는 마치 시간의 층이 겹친 듯한 감각을 준다. 필자가 90년대 유학시절 찾아보았던 시인이 오가던 길, 그가 살던 골목의 굴곡,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그 차가운 공간을 떠올리면, 초인은 더 이상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는 것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그것은 “초인은 언제 오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자기에게 돌려보는 일이다. 초인은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책임의 다른 이름으로 이미 다녀갔을지도 모른다. 광야는 벌써 우리 앞에 펼쳐져 있고, 눈은 이미 내리고 있다. 문제는 ‘그 광야를 광야로 견디며 설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눈 속에서 길을 읽을 눈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26.1.16. 눈 오는 북경에서 라석 씀)

 

ㆍ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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