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 털어 취로사업 벌여 '빈민 구제'

  • 등록 2013.06.26 08: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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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5)]'나눔' 실천 진주 용호정원 박헌경 종택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公은 흉년 배고픈 시절 황금을 털어 가난을 규휼했네" 주민들 송덕비 세워
1920년대 기근 때 연못과 12假山 만들어 마을사람들에게 일자리 마련해줘
춘궁기 소작인들에게 받은 토지세 돌려주고 돈 빌려준 채권 장부도 불태워
용호정원도 담장 밖 마을 어귀에 지어 '개인정원' 아닌 '만인의 정원'으로

 

   
▲ 박헌경 선생이 기근 구제 차원에서 취로사업으로 만든 용호정과 연못

“공의 높은 덕은 자비와 사랑으로 공평하고 균등했네
힘을 다하시어 조상을 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황금을 덜어내 가난을 구휼했네
흉년 배고픈 시절에 고달픈 사람들을 구제하여 백성을 편케 했네
바다와 같은 은혜요 산과 같은 자비심이네
집집마다 기리는 소리 넘치고 사람마다 입을 모아 이 비를 만들었네
온 마을이 정성과 감격으로 돌을 세워 이웃으로 만들었네”
 

이는 진주 박헌경(朴憲慶) 선생 송덕비에 적힌 글이다.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가면 용호정(龍湖亭)이란 정자와 연못 그리고 한국식 정원 용호정원(龍湖亭園)이 있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입구)에는 크고 작은 송덕비 7개가 나란히 정원을 찾는 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이 송덕비는 포악한 지방 수령의 눈치를 보다가 마지못해 세운 것이 아니라 박헌경 선생의 은덕을 입은 사람들이 그 공덕을 높이 사 자진해 세운 것이다.

그곳에는 지금 박헌경 공(公)의 후손인 박우희(朴雨喜, 78살) 선생이 살고 있다.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자못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것은 나눔을 실천하여 크게 칭송을 받는 분의 흔적을 찾아가기에 그럴 것이다. 진주고속버스터미널까지 마중 나오신 선생은 시골 할아버지처럼 자상하면서도 격조가 있어보였다. 손수 운전하여 기자를 반갑게 집으로 안내하는 차안에서 선생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매우 겸손하게 선조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 놓았다. 

   
▲ 현재 용호정원과 종택을 지키고 있는 박헌경 공의 손자 박우희 선생

큰길에서 용산리로 들어가자 바로 왼쪽에 용호정이 보인다. “용호정원은 박헌경 선생님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개인공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부분 부잣집 정원은 자신의 한가함과 여유를 즐기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곳 용호정원의 경우는 정원 자체가 만인의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기자의 물음에 선생은 차근차근히 대답해나갔다. 

“할아버지께서 용호정원을 지으신 목적부터가 분명합니다. 당시 거듭되는 재해로 기근이 겹치자 재민구제를 위해 600여 평 연못과 중국 쓰촨성(四川城) 동쪽에 있는 무산(巫山) 수봉(秀奉)을 본떠 12무봉을 만든 것입니다. 그때 12개의 봉우리를 만드는데 흙을 퍼 날아온 사람들에게 돈이나 식량을 주었습니다. 나라가 해야 할 취로사업을 할아버지가 대신 하신 것이지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일자리 창출 사업입니다.” 

1929년 큰비가 쏟아져 개천 제방이 무너지고 그로 말미암아 용산리 40여 집 가운데 절반이 넘는 24채가 물에 떠내려가고, 4명이 물에 빠져 죽었던 참상이 일어났었다. 그렇다고 누가 쉽게 주민들을 구호할 생각을 할 것인가? 더군다나 1929년이라면 일제강점기 아니던가! 흔히 정원이라 하면 호사가들의 전유물 같이 느껴지는데 용호정원은 그 출발부터가 다르다.  

정원 공사 자체를 마을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니 박헌경 선생의 나눔정신이 대단하다. 얻어먹는 사람의 처지에서도 공짜로 넙죽넙죽 얻어먹기 보다는 스스로 흙을 져 나르는 등 노동의 대가로 쌀을 받는 게 당당할 것이다. 공은 이웃을 돕되 신명나게 일해서 얻는 수입의 기쁨을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용호정원 공사 이전인 1920년에도 박헌경 공은 마을 동쪽 산기슭에 취로사업을 구실 삼아 용산사라는 절도 지었다고 박우희 선생은 귀띔한다.  

 

   
▲ 구제를 받은 마을 사람들이 박헌경 선생을 기리려고 세운 7개의 송덕비

박헌경 공은 정원을 만들면서 ‘만인의 정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취로사업으로 가난구휼을 하고도 모자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정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원을 담장 안에 들여 놓은 것이 아니라 담장 밖 마을 어귀에 지은 것만 봐도 혼자 호사를 떨기위해 지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은 소작인들에게서 받은 토지세를 돌려주고, 돈을 빌려준 기록장부를 과감하게 태워버린 일까지 있었다. 당시 소작인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한 해 소작료와 지난봄에 빌린 장리쌀의 이자를 지주에게 갚아야만 했다.  

하지만, 원금과 이자를 갚고 나면 남는 것은 한 바가지의 누런 벼뿐이었다고 했다. 당장 끼니를 이을 수가 없기에 소작농들은 타지로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이 수도 없었고, 결국 소작농들은 토지세 거부운동까지 벌렸다. 그래도 지주들은 요지부동이었음은 물론 농토까지 빼앗기 일쑤였고 한다. 이때 박헌경 공은 지세를 돌려줌은 물론 채권장부를 과감하게 태워버린 것이다. 

   
▲ 반헌경 선생이 소작인들에게 토지세를 반화했다는 동아일보 1923년 5월7일 기사

박헌경 선생의 나눔 정신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자란 덕이 크다. 박헌경의 할머니였던 인동 장씨는 1910년 무렵 주변 사람들이 춘궁기에 끼니를 잇지 못하자 봄가을 마을의 100여 집에 쌀 한 되씩 나누어 주었다. 지금으로 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당시로는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엄청난 베풂이었다. 

이집 문중 가운데는 나눔을 다른 방법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박헌경 선생의 사촌 동생 박진환이 그분인데 3ㆍ1만세운동 당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고, 3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신간회 청년 간사로 활동했다. 이에 진주보훈지청은 1994년 6월 박진환 선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기렸다. 나눔은 가난한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경주 최부잣집이 나눔과 함께 독립자금을 댄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럼 박헌경 공의 뿌리는 어떻게 될까? 박우희 선생은 파조(派祖)에 대해 먼저 힘주어 강조한다. “충정공파 파조 충정공(忠貞公) 할아버지는 절신(節臣, 충절을 지킨 신하)입니다.” 조선시대 파조(派祖)인 청제(淸齋) 박심문(朴審問, 1408~1456) 선생은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람이다.  

박심문 선생은 세조 2년(1456)에 중국 사신인 질정관(質正官)으로 차출 되어 여러 번 사양 끝에 떠나는 바람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사신의 소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에서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소식을 듣고는 한양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그때 박심문은 좌우를 물리치고 심복(心腹)에게 말하기를 “내가 육신(六臣)들과 더불어 죽기를 맹약한 일이 있었다. 이제 그들이 모두 참형되었는데 내 어찌 차마 혼자만 살 수 있으며 산다하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선대왕(세종과 문종)을 뵐 수 있겠는가? 내가 오늘 이미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육신(六臣)과 함께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보내는 봉서(封書) 에도 썼거니와 어린 임금(단종)께 받았던 예조정랑(禮曹正郎) 관직만 묘비에 쓰게 하라” 하고 준비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니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선생의 음독자결 소식은 3일 뒤 한양에 있는 부인과 가족들에게 알려졌는데 선생의 부음을 받은 3일 뒤에 부인인 청주 한 씨 역시 46살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다. 선생의 유해는 의주로부터 선산이 있는 고양 원당리 포도골로 옮겨져 장사지냈다. 

그 뒤 300여 년 동안 박심문 선생의 의로운 죽음은 묻혔다. 그러다 단종의 매형인 헌민공의 꼼꼼한 기록에 의해서 이 사실은 밝혀졌는데 순조임금은 사칠신(死七臣)이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선생에게 가선대부이조참판을 추증했다. 그리고 1828년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으며 1871년에는 고종 황제가 충정공(忠貞公) 시호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이후 공주 숙모전, 진안 이산묘, 대전 숭절사 등 전국적으로 14군데의 사당에서 충정공 박심문 선생을 기리고 있는 것만 봐도 선생의 충절을 가늠 할 수 있을 것이다. 

충과 효는 둘이 아니라고 하더니 박심문 선생은 16살 먹던 해에 아버지가 안변(安邊) 임지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혼자서 고향으로 운구하여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러 세종임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약관의 나이에 대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게 충과 효를 겸비한 파조(派祖)의 정신이 어쩌면 박헌경 선생의 나눔정신을 이끌어 냈는지도 모른다.  

현재 용호정원을 지키고 있는 박우희 선생은 종손은 아니다. 박헌경 선생의 후손 가운데 박우희 선생이 유달리 종택과 용호정원을 사랑했고, 한문과 서예를 공부했기에 종택과 용호정원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아침이면 용호정원으로 나가 잔디를 손수 깎으면서 배고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았던 할아버지 박헌경 공(公)의 음덕을 기리고 있는 박우희 선생은 박헌경 할아버님의 베품정신을 실천한 기록들을 빼곡하게 정리해두고 있었다. 

   
▲ 2008년 진주문화원에서 박헌경 선생의 아드님인 청랑 박봉종 선생의 향토문화 창달과 보전에 힘쓴 공을 기려 세운 "노리랑가" 시비

“노리랑 노리랑 노라리오
노리목 고개로 넘어오소
용산사에서 종소리 나고 정화수천변에 너 기다린다
용호정지에 원앙새 쌍쌍 실버들 휘날려 님 생각이오
같은 마음 열두 봉우리(如意十二峰) 바위틈 기슭 꽃들만 피어서 가슴만 섧소
노리랑 노리랑 노라리오
노리목 고개로 넘어오소”
 

용호정원 한편에는 위와 같은 “노리랑가” 시비가 세워져 있다. 2008년 진주문화원에서 박헌경 선생의 아드님인 청랑 박봉종 선생의 향토문화 창달과 보전에 힘쓴 공을 기려 시비를 세웠다. 겨레의 고난과 함께 했던 대표적인 아리랑을 일제는 저항의 노래라며 부르지 못하게 했는데 박우희 선생의 아버님께서 이에 가사를 바꿔 지은 것이 ‘노리랑가’이다.  

 진주에서 진주대로로 산청을 향해 가다가 용호정원이 있는 용산리로 빠져 나가는 곳에 노리목이라는 고개가 있었다고 한다. 노리랑가는 어쩌면 서럽고 가난한 이들에게 노리목 고개로 와 위로를 받으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노리랑가는 일제강점기에 나라 없는 설움과 고향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주목 받고 있다.  

   
▲ 예전엔 재사였으나 원래 종택이 허물어진 뒤 종택으로 쓰고 있다.

조선시대의 박심문 파조(派祖)로부터 박헌경 선생의 나눔의 삶은 이렇게 노리랑을 노래했던 박봉종 선생과 현재 용호정원을 지키고 보살피는 박우희 선생으로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진주를 찾는 이들이여! 진주에 가거들랑 촉석루와 논개만 돌아볼 것이 아니라 용호정원에 들러 용호정원과 12무봉의 나눔 정신을 가슴 깊이 담아가지고 올 일이다. 

용호정원의 박우희 선생은 이웃 할아버지 같이 친근하면서도 내면 깊숙이에는 따뜻한 철학이 있는 종가의 후손의 모습을 간직한 분이었다. 나눔으로 아름다운 종가를 취재하면서 나 스스로 나눔으로 채워가고 있음은 참 행복한 일이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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