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진용옥 교수]
이종무의 생애
이종무(李從茂, 1360 ~ 1425) 장군은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장천 부원군 이을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었고, 만호(萬戶)의 벼슬에 있을 때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 이종무 장군
왕자의 란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 덕분에 익대 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으며(장천군으로 개봉),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1419년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로 출발하여, 이듬해 1424년 2월 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그 뒤 안주도병마사(安州都兵馬使), 안주절제사(安州節制使)를 거쳐 (左參贊) 등을 역임한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다시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1425년 음력 6월 9일 66살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세종은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6월 17일 내린 교서에서 세종은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라는 표현으로 비통함을 표시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우왕 때 벼슬을 하여, 창왕, 공양왕까지 고려조 마지막 네 명의 왕을 경험하였고,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기 4대왕을 모신 무인이었다. 66세의 일기 동안 모두 8대에 걸친 왕을 경험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안정된 대일관계를 마련하였으며 탄핵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를 관철한 투철한 무신 선비였다.
대마도 정벌
대마도가 옛날 우리 고려의 땅 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문헌뿐 아니라 일본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본 불교의 천태종 승려 현진(懸眞, 겡싱)의 저서 《사가묘략기》에 ‘대마도는 고려의 목(牧)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병조판서 조 말생이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현 경주)에 예속되었으며 우리 땅이라는 문적(기록)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대마도는 고려에서 만호(萬戶)라는 지방관을 파견, 다스렸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1419년(세종 1년) 6월 9일 상왕이 된 조선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안팎에 알렸다.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군를 삼군 도체찰사로,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로, 의정부 참찬 최윤덕(崔閏德)을 삼군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명하고, 우박(禹博), 이숙묘(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음력 4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경상․전라․충청도의 군함을 거느리고 왜적의 돌아가는 길을 맞이할 제 6월 초파일에 각도의 군함이 함께 견내량(見乃梁)에 모여 대기하기로 약속하고 또 호조참의(戶曹參議) 조치로써 황해체핵사(黃海體覈使)를 삼아 모든 장수의 일을 늦추거나 기회를 잃은 자를 사찰하고 영의정 유정현으로써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를 삼고 참찬(參贊) 최윤덕으로써 삼군절제사(三軍節制使)를 삼고 사인(舍人)오선경과 군자정(軍資正) 곽존중으로써 종사관(從事官)을 삼았다.
이달 기사(己巳)에 떠날 제 상왕과 임금이 한강정(漢江亭) 북쪽에 거동하여 전송하고 안장․말․활․옷․갓․신 등을 주었다. 경인(庚寅)일에 이종무가 아홉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巨濟) 마산포(馬山浦)에서 떠났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이 일었으므로 돌아와 거제에 닿았으니 배가 227척이요, 군사가 1만 7천 2백 85명 이었다.
정벌의 진행과 대가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사다모리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은 끈질기게 죄를 물었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다.
1419년 11월 9일 죄를 사하기 위해 종군하려는 김훈과 노이를 추천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 당한다. 그들은 무재가 뛰어나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해 종군하려 하였고, 이종무는 이를 세종에게 간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 등은 불충한 자를 종군시켰다 하여 이종무와 김훈, 이적 등을 처단할 것을 간하였으나 세종이 거부를 하였고, 이종무는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며 탄식을 했다. 그 후 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1420년 6월 5일 풀려나 서울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 왜 이종무 장군이 고기리에 안장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태종의 정벌 교유 –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
“병력을 일으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성현이 경계한 것이지만,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라,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외따로 떨어져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살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변경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백성을 살해하고,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벌어지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 부치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중략), 하지만 내가 널리 포용하여 더러움을 참고 오가게 했노라. 그 배고픈 것도 구제하였고, 그 통상을 허락하기도 하였으며, 온갖 구함과 찾는 것에 응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고, 다 같이 살기를 기약했더니, (중략)
내가 삶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어버리는 것을 오히려 하늘과 땅에 죄를 얻은 것같이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이제 왜구가 끊임없는 욕심으로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뭇 백성을 학살하여 천벌을 자청하여도 오히려 용납하고 참아서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제 한창 농사짓는 달을 당하여 장수를 보내 출병하여, 그 죄를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아아, 백성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생명을 물불에서 건지고자 하여, 말하여 나의 뜻을 일반 밷성에게 널리 알리노라.“
조말생이 도도웅와에게 보낸 항복 서찰- 대마도는 계림 목에 속한 우리 땅
“대마도는 애당초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되어 본시 우리나라 땅이었음이 문헌에 실려 있어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적고 또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오가는데 불편하므로 백성이 살지 않았더니 이에 왜노(倭奴) 중에 제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어 소굴을 삼아 간간이 <우리나라>에 몰래 들어와 평민을 노략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향상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가 우리의 덕성과 신의를 사모하여 정성을 바치던 것을 생각하여 너희들의 사신을 맞이하여 머무르게 하였고 또 너희들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여 상선(商船)의 오감을 허락하여 경상도의 곡식이 대마도로 건너가는 수량이 해마다 몇 만석이나 되었다.
이제 뜻밖에 <너희들이> 은덕을 잊고 의리를 저버려 스스로 화근을 만들므로, 이제 변량장수[邊將]에게 명하여 섬을 에워싸서 항복하기를 기다렸으나 오히려 미욱하게 고집을 피우고 깨닫지 못하는구나. 섬 가운데의 땅은 모두 뫼와 바위들이어서 곡식을 심을 수 없으므로 다만 틈을 타서 가만히 나와 남의 재산과 곡식을 도둑질하여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였고 너희들은 다만 고기를 잡아 팔아서 생계를 삼던 것이 이제 와서는 너희들이 스스로가 살길을 끊고 말았으니 이런 생업(生業)을 잃고서는 앉은 채 죽기를 기다릴 뿐이리라.
만일 일조에 뉘우쳐 땅을 받들어 항복한다면 도도웅와에게는 좋은 벼슬을 주고 두터운 녹(祿)을 내릴 것이요, 대관(代官) 등에게도 역시 넉넉히 돌보아 줄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리들도 아울러 우리 백성과 같이 대우할 터이니 이것이 곧 <너희들이> 스스로 새로이 착하게 되는 길을 찾는 동시에 살아갈 방도도 생길 것이다“하였다. <국조보감에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대마도와 독도 문제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할 때 ‘대동여지도’를 들먹이지 않는다. 왜냐면 독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우산국(우산도와 울릉도)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계획을 세워 편입한 영토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은 여진족이며 우해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무 상자를 싣고 가 위협으로 굴복시켜 편입시키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대 사건이었다.
▲ 이사부 영정
말하자면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주어야 할 땅이다. 실효적 지배보다는 역사적인 지배 상태다. 이에 비해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지만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
대마도와 한반도 국토관
일본인은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을 산맥으로 분류하고 전체 국토의 모습을 사냥하기 좋은 토끼의 모습이라 폄하했다. 덩달아 최남선은 호랑이라 하였으며, 지리학자 최창조는 거북이가 알을 까고 육지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했다. 모두들 한반도를 동물로 묘사했다. 일인들이 심어 논 국토관에 놀아난 꼴이다. 《해동지도(海東地圖)》나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 그리고 《대동여지도》에서의 우리나라 전체 지형은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다. 백두대간은 사람 몸의 등뼈처럼 국토를 지탱해 주는 지주의 역할이다.
▲ 조선국지리도의 팔도총도 |
신경준은 《산수고(山水考)》에서 나라 땅의 뼈대와 핏줄을 이루고 있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산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은 물이다. 우리나라 산수는 열둘로 나타낼 수 있으니, 산은 백두산으로부터 12산으로 나누어지며, 12산은 나뉘어 팔도가 된다. 팔도의 여러 물은 합하여 12수가 되고, 그 12수는 모여 바다가 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가 나누어지고 합함의 묘함을 가히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땅을 사람 몸으로 본 것이다. 특히 대동여지도를 보면 갓을 쓰고 양 팔를 벌리고 두발은 남해안 박고 서 있는 모습이다. 울릉도와 우산도는 배꼽에 해당한다. 사람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해양과 대륙을 아우르는 모습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보듯이 대마도가 있어야 국토의 균형이 잡힌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해양과 대륙을 아우르는 모습이다. 한 마디로 동물의 형국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한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보듯이 대마도가 있어야 국토의 균형이 잡힌 모습이다.
▲ 대동여지전도(왼쪽), 이종무의 대마도정벌 그림(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종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 속칭 능말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방 13척 정도의 장방형 호석(護石)이 둘러진 위에 봉분이 마련되었고, 정면에는 상석, 향로석과 빗돌이 있다. 상석은 근래에 마련된 것이며, 빗돌은 본래의 것으로 보이는데, 거의 마모되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렵다.
단지 비문 가운데 [장자승평입(長子昇平立)]이라는 글씨만 판독이 가능하다. 승평은 이종무의 큰 아들 이름이다. 빗돌의 크기는 폭 40cm, 높이 100cm, 두께 17cm 이다. 좌우에 문인석이 있고, 1975년에 후손들이 새로 세운 묘비가 있다. 1972년 재판에 승소하여 묘지를 되찾았다. (수지구청 문화체육과 ☏ 324-8050)
* 이종무 장군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