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홍사내 기자] 훈민정음이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라고 하는 것은, 그 만든 사람과 만든 때, 만든 원리가 뚜렷하고, 창제 원리의 논리 체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며, 세종의 주체 의식과 백성 사람 통치 철학이 깃들어 있어 훌륭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그가 언제부터 어떻게 언문 창제 작업을 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집현전 학사들이나 신하들이 모르는 동안 집안에서 자식들과 의논하면서 비밀스럽게 작업하였다는 것 정도이다.
최만리의 상소에서 ‘이제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구실아치 10여 사람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해 놓은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가져다 붙이고 장인(匠人) 수십 사람을 모아 나무판에 새겨 떠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여론)가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한 말이나, 왕세자에게 글자 만드는 일을 의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창제한 사실을 밝힐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의공주에게 장가든 안맹담의 집안 ‘죽산안씨대동보’의 기록에는, ‘훈민정음을 만들 때 세종이 변음(變音)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해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라는 글이 있으니, 이 정도면 ‘어떻게’라는 부분은 부족하나마 설명이 된 듯하다. 그러면 ‘언제’부터 창제 작업을 시작하였을까?
세종이 새 글자를 만들기 시작한 구체적인 때를 언급한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그의 업적과 어록을 잘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찾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세종 14년(1432) 6월 9일 ‘삼강행실’이란 책을 만들었던 일에 주목하고자 한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치고, 그들의 생각을 글로 써서 펼쳐 보일 수 있도록 하려는 글자 창제의 발상을 하게 된 것은 《삼강행실도》를 만들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우매한 남녀 백성이 모두 읽을 수 있도록 그림까지 그려서 편찬케 한 도덕책인데, 당시 백성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가르쳐서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발상을 임금이 손수 간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양반이나 사대부가 학문하는 것은 인격 수양에도 도움을 주었겠지만, 지식이 권위를 내세우거나 과거 급제로 관직을 얻고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던 시대에, 일반 평민들에게 필요한 일상적 교양을 위해 서적을 만드는 일은 드문 일이다.
▲ 충신, 효자, 열녀 330명의 사례를 모아 세종 때 책으로 만든 조선의 윤리서 《삼강행실도》 |
교육이란 성현의 말씀을 듣거나 배워 알면 족하였고, 더구나 평민이나 어린이, 부녀자들까지 교육을 시키려는 생각을 임금이 직접 챙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종은 그림을 그려서라도 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읽히려고 했으니, 문자(한자) 지식이 곧 학문이라고 여겼던 양반 사대부가 그 대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무리 천한 백성이라도 임금이 보살펴야 할 관심의 대상이고, 그들도 소중한 삶의 주체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이며, 그것이 이른바 세종의 민본정치의 특별함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면, 그 문장은 한자(漢字)였으므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어도 대다수 백성에게는 읽을 수 없는 책이 되고 만 것을 세종은 파악하였을 것이다. 글을 잘 모르는 백성에게 읽으라고 책을 만들어 주었으니 한편으로 미안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글자 문제 앞에서 세종은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얻은 결론은, 백성이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자를 만든다면 어떠한 내용이라도 다 전달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단순하면서도 극명한 해답을 얻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도 한문이 어려워 이두라는 글자를 써서 문장을 끊어 읽으며 뜻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두는 한자의 음을 차용한 표기로서 이것 또한 체계를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글자이다. 물론 글자를 어떻게 만들까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해 <삼강행실도>와 같은 그림책을 만들어 본 사람만이, 끝내 소통하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글자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한 단계 높은 체험적 묘책이었다.
세종 10년(1428) 10월에 처음 백성을 교화시킬 새로운 책을 편찬하라 명령하였고, 세종 13년(1431)에 좋은 행적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서 자세히 설명한 책을 편찬하라고 명한 일이 있다. 이에 이듬해인 세종 14년(1432) 6월 9일 《삼강행실》이란 책을 집필하여 임금에게 바쳤고, 세종 16년(1434) 11월 25일 펴냄으로써 종친과 신하들, 그리고 각 도(道)에 반포하게 된 것이다. 그림까지 그려서 읽히게 한 점과, 내용 중에 나오는 인물이 일반 백성이었다는 점은 그 독자 대상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세종이 《삼강행실도》에 대해 고심했다는 확실한 근거는 언문을 창제한 뒤 최만리 등이 상소한 내용과 함께 나눈 대화에서 표출된다. “지난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세종 25년(1443)에 언문을 창제하였으니 꼬박 10년의 세월 동안 글자를 만드는 데 몰두하였던 것이다.
▲ 《삼강행실도》를 펴낸 이후 10여년 몰두 끝에 훈민정음을 반포했을 것이다. 그림은 "훈민정음반포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
이제 《삼강행실도》 서문에서 세종의 생각을 느껴 보자.
“… 신해년(1431)에 우리 주상전하께서 가까운 신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 백성들이 군신·부자·부부의 큰 인륜에 친숙하지 아니하고, 거의 다 타고난 천성에 어두워서 항상 각박한 데에 빠졌다. 간혹 훌륭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있어도, 풍속·습관에 옮겨져서 사람의 보고 듣는 자의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일도 또한 많다.
나는 그 중 특별히 남달리 뛰어난 행실을 뽑아서 그림과 찬을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나누어 주고, 우매한 남녀들까지 다 쉽게 보고 느껴서 분발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하면, 또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한 길이 될 것이다.’ 하시고, 드디어 집현전 부제학 설순에게 명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
편찬을 마치니, 《삼강행실(三綱行實)》이라고 이름을 내려 주시고, 주자소로 하여금 인쇄하여 길이 전하게 하였습니다. … 백성을 몸소 실천케 하고, 마음으로 얻게 한 결과로써 감화되게 하는 것은 이미 그 지극함을 다하였건만, 그리고도 오히려 일으키는 방법에 다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드디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널리 민간에 펴서 어진 이거나 어리석은 자이거나 귀한 사람·천한 사람·어린이·부녀자의 구별 없이 다 즐겨 보고 익히 들으며, 그 그림을 구경하여 그 모습을 상상하고, …”라고 하였다.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azaq196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