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애꾸눈 장수 이진무 선생

  • 등록 2017.03.26 1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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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한국인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 동북으로 망명하여 조국독립을 기필코 이룩해야 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중국인들 못지 않게 일제의 만몽침략에 맞서 결사적으로 항쟁하고 있습니다.(중간줄임) 만몽침략주구배(보민회, 선인조합, 동아보민회, 선민부, 신민공소 등)들을 소멸하지 않으면 그 위해성은 엄청날 것입니다. 때문에 한, 중(韓中) 각계 인사들은 주구배들을 박멸함으로써 안동성(安東省)의 치안과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것이다."


이는 독립투사 이진무(李振武, 1900. ~1934. 5. 18) 선생이 '국민부에서 중국관원 및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에서(1930년 10월)' 에서 한 말이다. 이진무 선생은 1919년 광복군총영에 가입한뒤 무장항일투쟁을 벌였으며 1925년에는 정의부원으로 일경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일명 흑선풍) 등을 하다가 잡혀 34살의 젊은 나이에 1934년 평양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다.




평북 정주(定州) 에서 태어난 선생은  3·1독립운동 직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군총영에 가담하였다. 1920년 8월 15일 중대사명을 띠고 국내에 들어와 신의주역과 신의주에 있는 호텔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였다.


이어 선천군 약수참(宣川郡藥水站)으로 가서 일경과 그 주구를 사살하는 한편 당시 서울 배재학당에서 재학중이던 김석호(金錫虎)와 협조하여 신의주감옥 여자사무원의 안내를 받아 그 수직청(守直廳)을 습격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1925년에는 정의부(正義府) 제5중대에 소속되어 활약하였으나, 같은해 7월 4일에는 김귀진(金貴振)·김승엽(金承燁) 등과 함께 평북 철산군 차련관주재소(鐵山郡車輦館駐在所)를 습격하여 일경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1927년 7월 정의부 제5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명을 받고 홍학순(洪學淳)·김봉수(金奉秀)·김치복(金致福)·이원진(李元珍)·장기천(張基千) 등을 인솔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구성(龜城)경찰서 조악(造岳)파출소를 습격하여 일경을 사살하였다.


같은해 8월에는 평북 정주(定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1월에는 평북 신의주 광평면 청수동(廣平面靑水洞)에서 일경 12명과 만나 교전하였다.1933년 6월 조선혁명군 제5중대 부관으로서 무장활동을 계속하다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는 '애꾸눈' 지휘관으로 용감무쌍하여 일목장군(一目將軍)이라 불리었으며, 불의를 보면 불같이 노하는 성미이기 때문에 흑선풍(黑旋風)이라 불리기도 하여 그의 이 별명만 들어도 일경과 밀정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고 한다. 이진무 선생은 1935년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적>
·1919년 광복군총영에 가입후 무장항일투쟁
·1925년 정의부원으로 일경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일명 흑선풍)
·1934년 사형순국(평양형무소)


<자료: 국가보훈처>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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