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안 쓴 처용(處容)이 바로 심소(心韶)

  • 등록 2024.09.03 11: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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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9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궁중(宮中)음악과 춤의 명인, 99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심소, 김천흥 명인은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유머와 재담(才談)으로 상대와 주위를 훈훈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 특히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겸손의 미덕을 실천해 온 분이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나는 지금도 심소(心韶), 김천흥 선생을 떠 올리면 잊히지 않는 말과 함께 그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바로 지그시 눈을 감은 선생이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고 생활해 왔다는 자체가 참으로 망극하다”라는 진심어린 표현이다. 얼핏 듣기엔 누구나 갖는 마음씨처럼 보이지만, 액수의 다과(多寡)를 떠나 선생의 순수하고 진심이 담긴 마음씨를 엿보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이 장수할 수 있었고, 건강한 삶을 영위해 온 배경도 자세히 살펴보면 건강식이나 운동이 아니고. 바로 국가와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의 미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왔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 아닐까 한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심소 김천흥 선생의 5주기 추모문화제가 <국립국악원>과 <심소 김천무악예술보존회> 공동주최로 열린 바 있는데, 당시의 기억을 되돌려 행사 내용을 되새겨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판단되어 이 난에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행사 진행에 앞서 한명희의 추모사 가운데 선생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한 토막 옮겨 보도록 한다.

 

“심소 선생은 평생 어린이셨다. 품성도 용모도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선동(仙童)처럼 천진무구한 동심의 어린이셨다. 기예와 명성이 한 시대를 풍미했어도, 여느 소인들처럼 쓸데없는 허세나 거드름은 아예 발붙일 틈새가 없었다. 천성이 요산요수(樂山樂水) 하며 세속의 속박을 초탈했으니 세상 공명인들 연연할 리 만무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행적은 행운(行雲)유수(流水)와 같을 수밖에 없었고, 말년의 주름진 노안(老顔)에서처럼 항상 자애로운 미소와 화평한 얼굴색이 평생 떠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정 한 때, 우리는 심소 선생이 계셔서 따뜻했었다. 행복했었다. 5주기를 맞아 후학들이 선생을 더욱 그리워하는” (아래 줄임).

 

행사의 시작은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서 선보인 <조선 마지막 무동(舞童) 심소 김천흥 추모기념전>이었다. 소개된 자료의 내용, 하나하나가 참가자들의 뇌리에서 잊혀 가고 있던 심소 선생의 생전 활동을 다시 기억하게 만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학술 세미나 및 처용랑의 재현 시연회>도 의미있는 행사로 남아있다.

 

양혜숙의 기조연설에 이어 유정숙의 <마지막 무동 김천흥의 예술세계와 무용사적 의의>, 이진원의 <김천흥의 해금 음악 및 그 전승 의의>, 윤지현의 <김천흥 컬렉션의 춤 기록화 현황과 전망>, 그리고 신상미의 <김천흥의 창작무용극 ‘처용랑’의 복원 및 재현을 위한 사료분석>이라는 논문 등이 발표되어 관심을 끌었다. 전통무용 분야와 음악 분야에 끼친 선생의 다양한 영향이라든가, 그 결과에 대한 폭넓은 의견 제시,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선생의 생전 업적을 재조명하게 된 것이 후학을 지도하는 처지에서 매우 유익한 자리였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4인의 논문 발표에 이어서 선생의 출세작으로 알려진 1959년도 창작무용극, <처용랑(處容郞)>을 재현해 보는 시간도 매우 의미가 깊었다. 작품 시연(試演)은 선생을 근거리에서 모셔 온 김영숙의 지도로 진행되었고, 출연은 정재연구회 회원들이 참여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참고로 처용랑은 본래 용왕의 아들이었는데, 인간으로 화신(化身)하여 임금을 따라 경주에 와서 왕정을 돕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처용이 없는 사이에 부인의 예쁜 미모를 탐하는 역신(疫神)이 인간으로 화신하여 동침(同寢)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처용은 태연하게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동경 달 밝은 밤에 밤새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라히 네히로세라.

아흐 둘은 내해어니와 둘은 뉘해어니오.

본디 내해다마는 아인들 엇더 하리잇고.”

 

이에 역신은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당신의 아내를 사모해 잘못을 저질렀으나 당신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받았다.”라고 사과하며 물러갔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처용의 화상을 그려서 대문 앞에 붙여 놓기 시작하였고, 역신들은 얼씬거리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전통무용인들 사이에서 심소 선생을 일러 <가면 안 쓴 처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도, 어찌 보면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선생의 인자한 모습과 처용의 모습이 흡사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리라.

(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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