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터라는 곳으로 가는데요. 사형 한 분이 수행하는 움막이 있다하여...”
국도에서 갈라져 40여분을 덜컹거린 끝에 시골버스는 우리를 왕산골 종점에다 짐짝처럼 부려 놓았다. 시간은 아직 한낮이지만 늦가을 해는 잰걸음으로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터라, 서둘러도 해 전에는 들어가기 어렵겠는데요. 스님, 먼 길이니 일단 요기부터 하십시다. “
우리는 점방 쪽마루에 걸터앉아 라면에다 식은 밥을 말아 태백준령을 넘을 힘을 비축했다. 라면을 먹으면서 나는 초면임도 잊은 채 언제 출가를 했느냐, 어느 절에서 입문 했느냐, 은사스님은 누구냐는 등 시시콜콜한 질문들로 고요를 깨웠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해 보이는 그였으나 속인의 부질없는 물음에 이름 모를 산새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서둘러 전방을 떠나긴 했으나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산 그림자가 가로로 눕기 시작했다.
“남들은 겨울이 무서워 시내로 내려가는데 저는 무엇을 얻으러 산 속으로 들어가는지...스님께서는 그 움막에서 동안거(冬安居)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해는 벌써 안반데기 마루에 걸려있었고 그는 서녘하늘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만 지어 보였다. 주홍 햇살을 담뿍 받은 구릿빛 얼굴과 대비되어 하얀 이는 더욱 빛났고 그 해맑은 표정에 눌린 나는 대답을 채근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한 참을 침묵에 빠져 걷다가 아니나 다를까, 내공 약한 내가 먼저 침묵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 뱀처럼 꾸불거리는 구빗길을 오르다보니 제 인생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남들이 평탄한길, 지름길을 걸을 때 저는 자갈밭 길, 쑥대밭 길을 걸었으며 남들이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멀리 멀리 돌아 아직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더디게 멀리 돌면서 남들 보지 못하는 걸 많이 보고 왔으니까요“
이번에도 알 듯 말 듯 한 미소만 지어보이는 그의 등 뒤로 가래나무 잎이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고 있었다.
닭목이재 서낭당을 지나고 벌말 삼거리를 지날 때까지도 그는 한 마디 말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가끔 나무 꼭대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도 하고 새소리가 들리면 귀를 쫑긋 세웠다. 바람이 불어오면 발걸음을 멈춘 채 눈을 감았다.
“여기가 배나드리입니다. 저는 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되지만 스님께서는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아직도 30여리를 더 가셔야합니다.”
“처사님, 세상에는 참 여러 길이 있지요. 어느 길을 걷느냐에 따라 도착지는 전혀 달라지지요. 처사님께 맞는 길을 잘 골라서 가시길 바랍니다.”
하늘엔 벌써 별꽃들이 튀밥 터지듯 피어났고 그는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니 자욱 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진달래꽃 피던 길에 첫사랑 불태웠고
지난여름 그 사랑엔 궂은 비 내렸다오
종달새 노래 따라 한세월 흘러가고
뭉게구름 쳐다보며 한 시절 보냈다오
잃어버린 지난 세월 그래도 후회는 없다
겨울로 갈 저 길에는 흰 눈이 내리겠지
찐빵이라는 다소 악의적(?) 애칭으로 통하는 6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 최희준. 그의 세련된 창법에서 느껴지듯 1936년 서울의 한 복판인 종로구 익선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법대 3학년 때 교내장기자랑에서 입상한 게 계기가 되어 음악의 길을 걷게 된다. 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거장 손석우를 만나 가요계에 입문했다. 1960년 <목동의 노래>로 데뷔하였고, 그 이듬해 <우리 애인을 올드미스>를 히트 시키며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밝고 건전한 노래로 전쟁의 상처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파했던 명랑배달부였다. 1966년 MBC10대 가수 가수왕 상을 받았으며, 1964년부터 1966년 까지 TBC 가요대상을 내리 3연패하며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2007년에는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가수 가운데 최초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오늘 감상할 <길>은 1972년에 발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필자의 애청곡 100선 안에 꼽히는 곡이다. 남들 앞에 자랑할 만한 업적이 충분한데도 늘 겸손함을 잃지 않는 최희준!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니 그의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목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