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치바현 관음사 조선인 위령 '보화종루' 새단장

  • 등록 2025.07.31 12: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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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간 시민들의 성금으로 3년 3개월만에 완성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근현대사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자국의 자연재해(관동대지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라시노수용소에서 끌려나와

   하룻밤 묶여 지새운 관음사 뜰 안의

   은행나무 그루터기에 화려한 버섯이 피어난다

 

   5분 거리 다카쓰구 마을의 공유지인

   나기노하라에서 생죽음을 당한 뒤

   백목련 나무뿌리에 얽히어 묻혀있다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국 하늘 바라보고

   위령의 종소리로 고국의 향수를 달랬다.

                                         - 정종배 <관음사 보화종루 앞에서> 가운데 -

 

1923년 9월 1일 낮 11시, 일본 관동지방(도쿄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 군마, 도치기, 이바라기, 치바현)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 큰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를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간토다이신사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관동대지진, 간토대지진, 간토대학살’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최근에는 ‘ 1923 간토대학살’로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를 더 명확한 말로 고친다면 ‘1923 조선인 간토대학살’ 이라고 부르는 게 그 사건의 의미가 분명해질 듯하다. 무고한 조선인들이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의 큰 지진 때 대학살을 당했다는 내용이 들어가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싶다.

 

당시 관동지방에 머무르던 조선인들은 일제의 조직적인 ‘조선인 대학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지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명목으로 도쿄ㆍ가나가와ㆍ사이타마ㆍ치바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들은 ‘조선인 폭동’에 대한 전문(電文)을 준비해 9월 2일 오후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夫)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 장관과 조선총독부ㆍ타이완총독부에 타전했다. 일본 정부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댄 것이다.

 

오늘은 그 학살 현장의 한 곳인 도쿄 인근 도시 치바현(千葉県) 소재 관음사(觀音寺)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제(30일) 《1923 관동대학살- 생존자의 증언》을 쓴 정종배 시인으로부터 장문의 글 한 편을 받았다. 글의 제목은 <관동대학살 위령의 종루 ‘보화종루’ 개수 사업 경과보고서, 아래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쓴 사람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 일본 현지 위령의 종루 보수 추진위원회, 아래 ‘추진위원회’>의 양윤석 총무다. 요지는 “관동대학살 100주년을 앞두고 시작했던 위령의 보화종루 개수 사업이라는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으며 그간의 추진 경과를 보고드립니다. 2025년 5월 11일 <보화종루> 단청보수가 완료된 이후, 6월 6일에는 과거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하셨던 김운성, 김서경 작가가 그동안 보화종루 개수를 위해 모금 및 사업 이행에 참여해 준 분들의 이름을 새긴 <보화종루 개수 기념 명판>의 제작을 완료하였고, 이 작품은 일본으로 운송되어 이번 7월 24일에 관음사 보화종루 옆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보화종루 개수 한국측 추진위원회는 맡은 바 소임을 완전히 다 마쳤고 2025년 7월 말로 3년 3개월 여만에 해체하게 됩니다.” 내용이었다.

 

치바현 관음사 · 위령(慰靈)의 종 · 보화종루(普化鐘樓)라는 말만 나오면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리고 불현듯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라고 했던 하야시 에이다이 (林 栄代, 1933~2017)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하야시 작가는 50년 동안 그의 삶을 완전히 쏟아부어 조선인 강제연행 등을 파헤쳤으며 57권의 책을 쓴 양심있는 일본 작가다.

 

내가 치바현 나기(노)하라마을의 조선인 학살현장을 답사한 것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했던 2010년 8월 15일로 광복 65돌이 되던 해였다. 그곳은 일본 구(舊) 육군 나라시노 연습장이 있던 곳으로 조선인 6명이 처참하게 살해되어 목련꽃 나무 그늘에 암매장되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1970년대 후반까지 발설하면 안 되는 공공연한 <금기>였다. 그러다가 지역의 한 중학교 교사가 학생들과 조사하여 학살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98년에는 75년 만에 유골 발굴이 이뤄져 6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화장한 뒤 근처 관음사에 모시게 되었다. 관음사(觀音寺)는 바로 억울하게 숨져간 조선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곳으로 이곳에 한국식 종각인 보화종루(普化鍾樓)가 건립된 것은 1985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종루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단청이 벗겨지고 기와가 새는 등 개보수가 필요한 상황에 이르자 2021년 겨울, 전 한국영상대학교 최유진 학장은 관동조선인학살과 관련한 다큐영화를 만들었던 재일동포 영화감독 오충공(吳充功) 감독으로부터, 2023년 관동대학살 100주기를 앞두고, 1985년 한국의 문화예술인들이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시민들이 최초로 건립했던 관동조선인학살 위령 건축물 <보화종루>의 단청보수와 100주년 추모문화제를 한일 양국 시민들이 같이 힘을 모아 추진해 보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1985년 보화종루 최초 건립 때도, 2003년 종루 단청보수 때도 참여했던 최유진 교수는 100주기를 맞아 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관련 단체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2022년 4월 사단법인 유라시아문화연대(이사장 신이영)가 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 2022년 5월 16일부터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2022년 5월에 신이영 이사장과 최유진 기획위원장을 필두로 출범한 추진위원회는 ‘관동대학살 100년에 대한 기억’의 환기와 모금 운동 활성화를 위해 2022년 5월 27일 도봉문화원 소공연장에서 오충공 감독의 <감춰진 손톱자국-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영화상영과 관동대학살 사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종루 단청 개보수 일은 관동대학살 100년을 맞아 완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추진위원회는 이에 드는 경비를 한국과 일본 쪽 시민들의 성금으로 충당하고자 부지런히 모금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문화재 수리 전문업체인 (주)한울한옥의 이일호 도편수와 함께 2023년 5월 2일부터 5월 4일까지 현지답사 결과 기와 부분만이 아니라 종루 상부 구조가 들떠 있고 기둥이 삭거나 벌레가 먹는 등 그동안 이 지역의 간헐적인 지진에 의한 충격으로 4개의 기둥 모두가 밀려있는 등, 종루의 목구조가 자칫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고 결론은 종루의 기와와 목구조를 전면적으로 해체해 재조립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보화종루>의 단청보수와 100주년 추모문화제만을 고려했던 공사였다면 2023년 7월 말부터 공사에 들어가 9월 초에 공사를 끝내려 했던 것이 그만 종합적인 종루 개보수를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보수 비용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일을 시작한 이상 끝을 보기 위해 한국 쪽에서는 새로운 개보수 계획서를 일본 쪽에 제시했으나 일본 쪽 추진위원회에서 난색을 표명하며 지지부진 시간을 끄는 바람에 2023년 9월, 관동대학살 100주기 추모문화제 계획까지도 무산되는 난항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끝없는 교섭 끝에 2024년 1월 6일, 마침내 일본 관음사 쪽과 합의를 이뤄 일본 쪽에서 목구조 공사를 담당하고, 한국 쪽에서는 개수공사에 필요한 기와제공과 단청보수를 맡기로 한다는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업이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여기까지의 경과를 말하고 보니 일부 독자들은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왜, 애초 “종루의 전반적인 종합진단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 말이다.

 

이 점에 대해 추진위원회 측은 “추진위원들이 2022년 11월 14일 단청 장인(匠人) 한 분과 함께 일본 현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답사를 갔었다. 그러나 당시는 단청 견적과 추모문화제 장소 점검 등을 위해서 잠깐 살펴본 탓에, 종루 건물에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청장인은 단청 부분만을 볼 것이기에 처음부터 문화재전문위원이 함께 갔어야했겠지만 그런 판단은 항상 나중에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라서 그걸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단청부분만을 위한 개보수비용과 종루 전체 건물에 대한 개보수 비용의 차이가 엄청났다는 점이다.

 

추진위원회에서 이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을 무렵, 기자는 정종배 작가로부터 보화종루 개보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무렵 한일간에 대대적인 성금 모금이 다시 시작되었다. 기자도 적은 액수지만 기왓장 하나 값을 거들었고, 주변에 널리 알린 적이 있다.

 

 

잠시 정체되던 보화종루 개보수 작업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2024년 4월 29일 추진위원회에서는 (주)고령기와에서 무궁화 문양을 새겨 넣어 만든 보화종루 보수용 특수 내진 기와를 (주)한울한옥을 통해 일본 관음사로 보냈다. 그 뒤 일본 쪽으로부터 기와 설치 공법을 바꾸는 바람에 기와가 조금 더 필요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12월 26일에 추가로 더 보냈다. 기와 교체 작업은 기존의 보화종루 기와를 걷어내고 목구조 개수공사를 마친 뒤라야 가능한 것으로 이 작업은 2024년 연말까지 이어졌으며 드디어 기와공사에 들어가 2025년 2월 말에 기와공사를 마쳤다.

 

3월 초부터는 한국의 단청 장인들이 현지에 가서 바로 단청공사를 시작해야 했으나, 단청 전문인력 확보에 다소 어려움을 겪다가, 4월 4일 한국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단청명장 양영송(국가유산 수리기능자 화공 제579호), 양용선(국가유산 수리기술자 단청 제314호) 형제를 포함한 전문 단청팀(4명)과의 계약을 체결하고 4월 25일부터 공사를 시작해 예정했던 시기인 5월 11일에 무사히 단청공사를 끝냈다.

 

 

 

이어 보화종루 개보수를 위해 성금을 보내준 분들의 이름을 새긴 <보화종루 개수 기념 명판>이 한국에서 제작되었고 이 명판은 2025년 6월 9일 일본 현지로 보내져 7월 24일 관음사 경내 보화종루 옆에 설치되었으니, 감격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공사를 위해 모금을 해준 사람들은 한국의 시민들과 재일본한국인연합회 그리고 일본 관음사에 직접 기부한 사람들로 성금액은 모두 9,250만 원이었다. 이리하여 보화종루 개보수를 위한 3년 3개월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추진위원회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장인(匠人)들과 한일 간의 성금을 모아준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일본 관음사 경내의 보화종루는 지금처럼 산뜻한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어려운 여건임에도 앞장서서 보화종루의 재탄생 결실을 이룩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일본 현지 위령의 종루 보수 추진위원회>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이번 치바현 관음사 조선인 위령 보화종루 개보수일을 총괄한 추진위원회 총무 양윤석 씨는 말했다.

 

“우리가 아쉬운 점은 생각했던 대로 보화종루의 안전을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은 담보할 수 있도록 전면 해체 재조립 공사를 못했다는 점과 애초에 계획했던 추모문화제를 더 이상의 예산이 없어 치를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2025년 7월 25일 일본 관음사측에서 이번 8월 29일에 보화종루 개수 완공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라는 통보가 왔고 한국측 추진위원회 4명의 항공료와 숙박비를 부담하겠다는 연락이 와서 7월 29일에 그 문제를 상의하면서 일정은 좀 조정해야겠지만 가급적 참석해서, 추모문화제 대신 조촐한 살풀이춤이라도 한번 영령들에게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도와주신 많은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술국치 100년째 되던 2010년 8월 15일, 광복 65주년이 되던 해, 조선인 6명이 잔학하게 학살된 그곳을 찾았던 기자는 그날 흰목련 나무 아래서 당시를 회상해 주던 오다케 할머니의 증언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기자가 쓴 시를 소개하며, 관음사가 있는 치바현뿐아니라 일본 각 곳에서 희생된 ‘1923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로 삶을 마감한 선열들의 영령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흰 목련꽃 나무 아래 / 말없이 잠든 그대들 누구인가! / 고향땅 어머니 곁 떠나 / 어이타 황천길 들었는가! / 오다케 할머니는 힘주어 들려주셨지 / 목련꽃 나무뿌리 밑에 조선인 시신 6구가 뒤엉켜 있더라고 / 그때 / 매미는 고래고래 악을 썼고 / 목련꽃 나무 옆 주택가 하늘은 흐려있었지 / 꽃은 지고 또 피고 또 피고 또 지고 / 뉘 집 귀한 아들이었을까? / 학살된 젊은 조선인을 그리며 관음사로 돌아오는 길 / 팔월 무더위는 끝내 / 속적삼을 적시었지”

                                          - 이윤옥 '그대들 누구인가? (치바현 나기하라 조선인 학살 현장에서)'-

 

* 이 기사에 쓴 사진은 오충공 감독, 관음사, (사)유라시아문화연대, 이윤옥 제공의 사진임을 밝힌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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