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데릴사위” / 전옥선

  • 등록 2018.06.26 11:23:54
크게보기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30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나는 전 씨 가문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들만을 선호하던 그 세월에 둘째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엄마는 은근히 바라셨다. 점쟁이도 찾아가고 심지어 첩약까지 잡수셨는데 내가 또 딸로 태어나서 얼마나 락심하고 눈물 흘리셨는지 모른단다.

 

엄마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뒷집 경식이 엄마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떡판 같은 아들을 덜컥 낳았다. 경호를 낳았을 때 그 집은 경사난 집처럼 흥성흥성했고 나를 낳았을 때 우리집은 초상난 집처럼 스산했다니 억울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엄마는 나를 낳고 3년 만에 또 녀자아이를 낳았다. 셋째까지 딸을 낳고 엄마는 눈물을 휘뿌리며 아들 없는 설움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경호네는 경호 아래로 또 남자아이를 낳아서 경호엄마는 우리 집에만 오시면 딸타령을 하셨고 그때마다 엄마는 입만 다시며 어색하게 웃으셨다. 아들 못 낳은 우리 엄마를 위안하는 소리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린 나도 엄마를 비웃는 것 같아 경호엄마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말귀를 알아들어서부터 아들타령을 못 박히게 들어온 나인지라 어떻게 하나 아들 있는 집 못지않게 부모를 기쁘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동네애들과 같이 놀이를 하던 공부를 하던 내가 대장이 되어야 직성이 풀렸는데 그것은 내 말이라면 밥 먹던 숟가락도 집어던지고 달아나오는 경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경호엄마는 그러는 경호를 아예 우리집에 가 살라고 내쫓기까지 하여 동네를 웃긴 적이 한두 번 아니다. 어느 날부턴가 엄마도 경호만 보면 기분 좋아하시면서 장래 우리집 "데릴사위"라 한다.

 

우리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두 집 부모님들은 안사돈 바깥사돈하면서 끔찍이도 가깝게 보내셨는데 나는 착하고 어리숙한 경호가 나의 신랑이 되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나보다. 경호엄마한테서 “며느리” 소리만 들으면 나는 경호를 골탕먹이군하였다.

 

교실 안에 혼자 두고 열쇠를 잠그고 나서 모른 체 한일, 우물에 빠진 물통을 건져내라고 못살게 굴어서 드레박타고 우물로 내려갔다 올라오지 못해 울게 했던 일, 눈싸움을 하다가 교실 유리를 깨버리고 나서 경호한테 덤터기 씌워 욕먹게 한일, 이런저런 일들이 지금도 생생이 기억된다. 그런데 경호색시로 되기로 마음먹게 한 결정적일이 발생하였다.

 

우리가 여남은 살 되던 해일이다. 우리 마을에는 “홍소병*”이란 별명을 가진 아저씨가 있었다. 어른인데 너무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키는 작지만 고지식한 분이라서 우리 아이들은 아저씨를 무서워하였다. 그 집에는 살구나무 한구루가 있었는데 그때 그 시절 간식거리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라 우리또래 조무래기들은 그 백살구를 먹고 싶어 하지 않는 애가 없었다. 그해에도 살구가 주렁지게 달렸는데 “홍소병”아저씨가 어찌나 경계가 삼엄한지 도저히 뜯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소병”아저씨가 진내*로 일보러 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부리나케 경호와 여러 친구들을 불러 살구뜯기 작전을 벌렸다. 그 집 울바자를 뛰어넘어 뒷마당에 들어갈 때까지 그런대로 순조로왔는데 경호가 나무에 오르면서부터 나는 너무 긴장하여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망을 보는 애를 자꾸 곁눈질하며 “안 오니? 안 오니?”하고 묻기만 되풀이 했다.

 

경호가 몇 개나 뜯었을까 “홍소병이다-”하는 소리에 아이들은 잽싸게 울바자*를 뛰어넘어 달아났다. 화들짝 놀란 나도 나무 우에 오른 경호를 기다릴 새 없이 불이 나게 뛰었다. 그런데 몇 발자국 못가 그만 발목을 접지를 줄이야! 울상이 되여 어쩔 줄 몰라 할 때 뒤늦게야 뛰어온 경호가 나를 부추겨 일어 세웠다. 내가 발목이 너무 아파 빌빌거리자 경호가 아예 나를 등쳐 업고 아저씨네 울타리 정문으로 향했다.

 

 

우리 둘은 영낙없이 붙잡히게 되였는데도 경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홍소병”아저씨에게 붙잡힌대도 무섭지 않았다. 경호만 옆에 있다면… 물론 우리는 붙잡혔고 아저씨한테서 백살구 한바가지 얻어가졌다. 익기를 기다리느라 우리를 못 먹게 한 것이건만 우리 철없는 것들은 이렇게 발목까지 상해가면서 도둑질하다니 참 맹랑하였다.

 

그 후 경호는 내가 발목이 나을 때까지 업어주고 부추겨주었다. 꼬마 “신랑”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마을 분들도 우리들을 보고 무람없이* 롱담을 했고 우리들도 사이좋게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결혼인연이란 따로 있나보다. 그 개구쟁이들이 사랑에 어섯눈*을 떠서부터 부모들의 언약 같은 건 아예 거들떠도 안 본다. 나는 웃마을의 한 반급 동창생과 결혼하고 경호도 다른 마을의 녀자와 결혼하였다

 

“데릴사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내 신랑이 된다고 골목길에서 깡충깡충 뛰며 좋아 어쩔 줄 모르던 경호, 그리고 경호가 좋아서 쩍하면 발목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며 경호에게 업혀 다니던 나, 우리는 지금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진심으로 대방*의 가정이 화목하고 잘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같은 하늘아래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존재이며 이것 또한 너무 소중한 인연이어서 저 인생 끝까지 갖고 갈 또 다른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오늘도 추억의 돛배에 령롱한 초롱불 알록달록 달고서 마음껏 노 저어본다.

 

< 낱말 풀이 > 

홍소병(红小兵) : 중국 문화혁명시기 "홍위병" 아래 소학생단체이름입니다.

진내 : 진(镇)은 중국 행정구역 이름으로 한국에소 “읍내”와 같은 뜻

울바자 : 울타리

무람없이 : 예의를 지키지 않으며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게.

어섯눈 : 사물을 보고 차차 이해하게 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석화 시인 shihua@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