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백색전화와 공중전화 이야기 그리고 노래

  • 등록 2019.06.11 11: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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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옥, 남백송 <전화통신>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24]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우리 인류는 출현의 역사가 가장 짧다.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으로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 것이 대략 250만 년 전 일이고, 조금 느슨한 기준으로 라마피테쿠스를 인류의 조상으로 친다 하더라도 500만 년 정도이니 지구의 역사에서는 바로 조금 전 사건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과학발전은 선악을 떠나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 가운데 인류의 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게 바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발전일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수레의 발명과 말의 이용은 교통과 통신에 비약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데, 제정로마는 제국전역에 숙박 및 편의시설을 갖춘 역참을 설치하고 공영우편제도 실시하여 교통과 통신의 혁신을 가져왔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는 교통과 통신 분야도 암흑기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하기 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19세기 초 조지 스티븐슨이 개발한 증기기관차가 상용화에 성공하고, 반세기 뒤 그레이엄 벨이 전화라는 가공할 발명품을 들고 나와 우리 인류는 대변혁을 겪게 된다.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이 발명품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게 되는데 1885년에 <한성전보총국>의 개국으로 전보시대가 열렸고, 1896년에는 궁중 각 부처 간에 전화가 설치되면서 우리나라도 전화시대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1889년에는 경인선 철로가 개통되어 철마가 이 땅을 달리게 되었고 1902년에는 전화도 민간인을 가입시키고 공중전화를 설치하며 본격적인 상업화 시대를 맞는다. 이제 이 글의 범주도 교통수단과는 작별하고 전화의 추억 속으로 들어간다.

 

이른바 “베이비부머”들이 청소년기를 보낸 1970년대만 하더라도 전화는 한 가정의 주요재산목록에 오를 만큼 귀하신 몸이었다. 당시 전화는 “백색전화”와 “청색전화”가 있었는데, 이는 전화기의 색깔 구분이 아니라 회선신청서의 구분이었다. 백색 신청서는 긴급용, 청색 신청서는 일반용이었는데 일반전화는 수요가 넘쳐 가설 까지는 기다림이 하염없었다. 그러니 전화가 시급한 영업장소나 사무실에서는 비싼 “급행료”를 지불해가며 백색전화를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백색전화는 사용권의 타인 양도가 가능하여 웃돈이 얹어져 거래되기도 했다.

 

공중전화도 귀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한 동네에 한 두 대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이용자의 줄이 장사진을 이루는 건 흔한 풍경이었다. 한 통화 3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끊기는 통화차단장치가 고안된 것도 그 때 생겨난 고육지책이었다. 대도시에는 60년대에 이미 자동교환 방식이 도입되어 이른바 다이얼 전화기가 보급되었지만 지방에서는 70년대에도 여전히 교환원이 일일이 연결해줘야 하는 수동방식이었다.

 

장거리 역외 통화일 경우 거리가 멀면 멀수록 전화선의 저항과 교환 장치의 수가 늘어나 감도가 매우 나빴다. 집에 전화가 없는 이들은 장거리 통화를 하려면 우체국에 가서 신청을 해야 했는데, 재수 없으면 몇 시간 씩 기다릴 때도 있었다.

 

전화요금도 이용자가 적은 심야시간대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는데, 연인들은 주로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 밤중에 전화선에 사랑을 실어 보내며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는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 연인들의 밀어는 호기심 많은 교환원에게 도청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까닭에 전화 교환원은 연예부 기자들의 매수대상 1호 이기도 했다.

 

이제는 스마트폰 한 대에 개인용 컴퓨터 보다 훨씬 다양한 기능이 들어가 있어 전화기로 못할 게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 시절이 아련해 지고 따스하게 다가오는 건 무엇 때문일까?

 

전화 통신   - 심연옥ㆍ남백송

 

여보세요 미스김 안녕하세요

여기는 청파동 청년박이요

지나간 일요일은 약속한대로

하루 종일 극장 앞에 비를 맞으며

기다리게 하였으니 고맙습니다

 

여보세요 박선생 오해마세요

남의 속 모르는 무정한 말씀

지나간 일요일은 감기 몸살에

하루 종일 빈방에서 쓸쓸히 홀로

여자 마음 몰라주니 야속합니다

 

여보세요 미스김 정말 미안해

아니요 박선생 천만의 말씀

닥쳐올 일요일은 단둘이 만나

아베크는 대천 바다 인천 월미도

젊은 날의 전화 통신 즐겁습니다  

 

1950년대 대표가수 심연옥은 2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에 김해송에게 발탁되어 뮤지컬가수로 예술계에 발을 디딘다. 48년 “투란도트” 49년 “카르멘 환상곡” 50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이름을 날렸다. 한국전쟁 때 뮤지컬 선구자 김해송이 납북되자 그 무대도 함께 사라져 유행가 가수로 전향했다.

 

52년에 김백희가 불렀던 “안해의 노래”를 개사하여 부른 “아내의 노래”와 “한강”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54년에 발표한 “야래향”은 훗날 대만의 국민가수 등려군이 다시 불러 전 아시아적인 사랑을 받았다. “야래향”은 만주에서 태어난 일본인 가수 야마구찌 요시오가 이향란이란 이름으로 부른 중국노래이다.

 

57년에 후배가수 남백송과 호흡을 맞춘 “전화통신”은 윤부길이 가사를 쓰고 한복남이 곡을 붙였다. 윤부길은 코미디계의 거물이며 대중예술 전반에 영향을 끼친 재주꾼이었다. 가수 윤항기 윤복의 남매의 아버지로도 역사에 남는다.

 

“빈대떡 신사”의 주인공 한복남 역시 재주가 많아 작곡가로서도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다. “전화통신”이 히트 하던 해 심연옥은 백년설과 백년가약을 맺고 가사에 전념한다.

 

남백송은 경남 밀양에서 35년에 태어났다. 김지환이 본명이며, 초기에는 김남욱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아무 노래나 잘 어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자신의 노래보다는 다른 가수의 곡을 더 많이 불렀다. 입을 거의 벌리지 않고도 정확한 발음을 내는 창법으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전화통신”은 음색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조화가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박자의 간결함으로 가사 전달이 뛰어나며 해학성과 경쾌함이 돋보이는 잊지 못할 가작이다.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ccrk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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