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훤칠한 체격은 아니었어도 늘 깨끗하게 곱게 머리를 얹고 거짓 없는 맑은 모습, 인자하시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가지신 우리 엄마에겐 그 어떤 곤란도 전승(싸워서 이김) 못할 것이란 없었단다.
농촌에서 밭일을 하곤 돌아와선 또 가마스를 짜서 애들을 공부시키던 엄마는 끝내 자식들을 위하여 연길시로 혼자 이사하려고 하셨단다. 그때 큰오빠는 장춘에서 둘째오빠는 룡정에서 나는 그냥 농촌의 인민공사식당에서 밥을 먹곤 식구가 많던 둘째 삼촌집에 있게 하였단다. 엄마는 돈을 벌기위해 그리고 둘째오빠와 나의 학습을 위하여 연길에 집을 잡고 일하여 돈을 직접 벌어 우리를 공부시키려는 타산(계산)이었단다.
도문에 있던 큰 언니는 “아는 사람 한사람도 없이 어떻게 시내에 가서 살겠냐?”며 무조건 엄마를 자기집에 모셔 갔단다. 엄마가 할 수없이 농촌을 떠나 큰딸집에 갔지만 나와 둘째오빠의 공부를 위하여 언니의 권고도 마다하고 끝내 연길에 이사했단다. 처음엔 지금의 공신에다 집을 잡았다가 공신 역시 농촌구역(그때는 농촌이었다)이여서 애들이 보는 것도 또 학교도 멀기에 다시 연길시 3중 부근에 집을 마련하였단다. 집이라야 12㎡(약 3.6평) 밖에 안 되는 원집(본채)의 사랑채를 샀었단다.
원집에 붙혀 지은 이 집은 밖에 큰비가 오면 집안은 작은 비가 내리더구나! 큰비가 오는 날이면 집안엔 난리가 벌어져 큰 소래(대야), 작은 소래 총동원되고 모든 걸레도 총동원 되였단다. 비가 끊으면 청소를 한다, 도배를 한다, 회칠을 한다고 볶았단다. 그러나 문만 열면 그 누가 보아도 깨끗하고 아담한 집이였단다. 엄마는 둘째오빠와 나를 륙속 연길학교에 전학시켰단다. 엄마는 “오두막이라도 내 집이 있구 너희들 데리구 있으니 한시름 놓이는구나!” 하시면서 기뻐하셨단다.
그러던 그 이듬해 가을의 어느 날 또 큰일이 날줄이야?!
밤 열시도 채 안 되었다. 우리는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쪽 문쪽에서 불빛이 얼른거렸단다. 내가 “불?!”하고 엄마를 깨우곤 오빠는 밖에 달려 나갔단다. 엄마는 바삐 날보고 소리치라하곤 물 양동이를 들고 나갔단다. 나는 맨발 바람으로 허둥지둥 난생처음 목이 빠지게 소리쳤단다. “불, 불이야! 도와줍소. 불이야! 우리집에 불이야….”하고 울면서 돼지멱 따는 소리를 질렀단다. 고마운 분들 공원가 28조의 모든 분들이 달려 나와 물을 치고 구새를 번지고…… 집안의 책과 옷가지들을 꺼내고……. 다행히 빨리 행동했기에 조금 탓을 뿐이었단다.
엄마와 나는 사시나무 떨뜻 했고 나는 목이 메어 말도 할 수 없었단다. 아버지 없는 우리집은 너무도 가련해 보였단다. 사람들은 하나둘 제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엄마에게 기대여 엉엉 울었단다. 엄마도 수고하셨다고 인사하며 사람들을 보내시곤 멍하니 어쩔 바를 모르는데 맞은 켠 집의 아버지가 “너무 근심마시오. 불난 집이 잘 산다꾸마. 아즈마이네두 이제 잘 살께꾸마!” 하더구나! 그때 그 소리가 우리에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
이튿날 아침엔 풍로불을 지피여 간단히 요기하고 우리는 학교에 가고 엄마도 일하려 가셨단다. 집은 잠시 그대로 범벅이 되구……. 오후엔 나도 조퇴를 하구 둘째오빠는 반급의 남학생 십여 명을 선생님이 보내어 데리구 왔더구나! 그때 사실은 구새(굴뚝)에서 불난 것이 아니라 길 가던 그 누가 담배꽁초를 던져 불쏘시개에서부터 불난 것이었단다. 우리집은 길옆집이였으니 아마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 구새 안도 일없다하더구나!
오빠네들은 마을 분들과 함께 구새도 잘 세우고 안팎 정리도 잘해주고 돌아갔단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엄마는 집에 들어가 불을 지펴 보시였단다. 굴뚝에선 연기가 무럭무럭 피여 올랐단다. 동네 분들도 인사하고 돌아가셨단다. 나도 좋아서 밖에 있는 펌프물을 잣아(빨아올려) 손발을 씻고 집에 들어갔단다. 그런데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흐느끼시더구나!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하였단다. 검뎅이가 묻은 엄마의 얼굴은 퍽 수척해 보였고 장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엄마의 눈도 충혈되었고 팅팅 부어 있었단다.
늘 곱게 얹고 있었던 엄마의 머리도 헝클어졌고 엄마의 옷 매무새도……. 나는 처음으로 우리 때문에 고생하시는 엄마가 더없이 불쌍하고 미안한 감을 느꼈단다. 아! 집이란 기둥이 든든해야 하는데 아버지 없는 우리집을 엄마가 혼자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이 시각 엄마 마음속에선 그 쓸쓸하고 막연함이 큰 강물로 흐르겠구나! 나는 밖에 있는 오빠를 나지막이 불렀단다.
오빠는 말없이 엄마 손을 당겨 온돌에 앉히시고 수건을 드리면서 “엄마, 엄마고생 알만함다……” 하고 나도 목쉰소리로 겨우 “불난 집이 잘 산다는데 무슨 근심다하시네. 명년이면 큰오빠두 졸업인데……” 하면서 해시시 웃었단다. 사실 나도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웃고 있었단다. “불난 집이 잘 산다”는 그 소리에 또 안정되었는지 엄마는 “너희들 아버지가 계셨으면 이런 일은 없었겠는데 너희들두 고생이구나! 오늘 동네 분들두 고맙구 선생님의 처사두 감사하구나! 난 모두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난단다. 이집을 내가 잘 지켜야 아버지 없는 너희들두 잘 자라겠지. 우린 잘 살거야!”
오빠는 “예, 이담엔 잘 삼다”하며 우리 셋은 서로 마주보며 피씩 웃었단다.
과연 “불난 집이 잘산다.”더니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던 우리 집이건만 모든 일이 척척 잘도 풀려 나갔단다. 엄마가 일하시던 사범학교에서는 보조금을 보내왔고 큰오빠는 중국과학원에 분배되었고 둘째오빠도 대학교 교수로 나도 중학교 고급교원으로 되어 엄마의 주름진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났단다.
지금도 나는 가끔 “불” 소리만 들으면 그 옛날 삼단같은 불길*이 우리집을 휩쓸던 그 시각이 눈앞에 삼삼거리고 아궁이 앞에서 조용히 혼자 흐느끼시던 불쌍한 엄마의 가냘픈 모습이 떠올라 찬 서리에 앞을 가리운 창 너머로 멍하니 흰구름 떠가는 그곳을 바라본단다. 나의 엄마를 찾아서……
낱말풀이
* 삼단같은 불길 : 큰 불을 비유한 말. 베를 짜기 위해 삼 껍질을 벗겨서 실을 뽑았다. 삼은 키가 150—200센티 가량 되었는데 그것을 묶은 삼단은 볏단이나 수수단보다 퍽 크게 묶어서 도랑물에 불렀다. 하기에 큰불은 삼단에 비유하여 삼단같은 큰 불길이 솟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