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의 꽃 백화점, 조선의 자본 빨아들이다

  • 등록 2019.11.03 11: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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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소비문화를 풍자한 김정구ㆍ장세정 <백만 원이 생긴다면>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27]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좋든 싫든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결과적으로 인류사회에 자본주의의 확산을 부채질하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에 가장 알 맞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산업혁명”은 공장제 성립 이후의 시기를 가리킨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면직기계와 증기기관의 발명, 제철기술의 발달로 영국의 산업은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른바 “1차 산업혁명”이란 것인데, 이 질풍노도는 구미 각국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쓸었고 자연스레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상업주의”라는 자식 까지 얻게 된다. 윤택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해야만 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 후에도 계속 산업혁명을 촉발시켜, 우리 인류는 지금 5차 산업혁명을 코앞에 두고 있다.

 

18세기 중엽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의 태풍은 그 발생지인 유럽을 훑고 머잖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사기노미야 무쓰히토라는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700년 동안이나 군림해온 막부정권을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완성한다. 이로써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사회문화 분야는 근대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뒤 이어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계몽사상가에 의해 주창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국시로 내걸고 대제국 건설의 야욕을 노골화 한다.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서양 신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당연히 자본주의의 길을 걸었고 식민지인 이 땅의 백성들도 그 낯선 경제체제와 마주하게 된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도읍인 한성에 들어와 촌락을 이루어 살게 된 것은 을사늑약 보다 앞선 19세기 말경이다. 당시 한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 불렸는데, 북촌에는 벼슬아치를 비롯한 부자들이 살고 있었고 가난한 선비들은 남촌에 모여 살았다.

 

처음 이 땅에 건너온 일본인 거류민들은 자국사회에서 밀려난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자 들이었다. 이들은 도성의 낙후지역인 진고개 근처에 모여 살았는데, 초기에 그들이 한 일은 주로 부동산 투기, 고리대금 및 전당포업, 매춘업 같은 불건전한 것 뿐 이었다. 이들은 이재(理財)에 어두운 ‘남산골 선비’들을 꼬드겨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집과 땅을 마구 사 들였다.

더군다나 경운동에 있던 일본 공사관이 갑신정변 때 불에 타자 진고개로 신축이전 하면서, 그 일대를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우리정부의 허가도 없이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지정해 버렸다.

 

이 때를 시작으로 가난한 선비나 살던 남촌마을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이십여 년 만에 북촌을 누르고 경성(한일강제합병 뒤 서울은 한성부에서 경성부로 개칭 됨) 제일의 번화가로 탈바꿈 한다.

 

초기의 일본인 상인들의 활동영역은 단순한 장사꾼 수준에 머물렀으나, 한일강제합병 뒤부터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비호아래 승승장구하여 조선의 경제권을 완전히 틀어쥐게 된다.

 

이 때 상업주의 전시장이랄 수 있는 일본의 유명 백화점들이 앞 다투어 이 땅에 진출하여 우리도 상업주의 시대로 발을 들여 놓게 된다. 한 반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백화점은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미스코시 백화점이었다. 대지가 700평이 넘었을 뿐 아니라 건평도 300평이 넘는 그야말로 초대형 상점이었다. 건물 또한 해방 때 까지 최고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을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건축의 화려함에 걸맞게 부유층을 대상으로 최고급 상품만 취급했다. 이에 질세라 미도파 백화점이 있던 자리에는 미나카이 백화점이 들어섰는데,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90% 이상이 애용할 만큼 일본인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롯데 백화점 소공동점 자리에 조지야 백화점이 문을 열었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히라다 백화점이 생겨나 치열한 경쟁을 했다. 이 가운데 조지야는 유일한 임대 방식이었고 히라다는 비교적 상품값이 싸서 중류 이하의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했다.

 

한편 ‘조선인의 거리’인 종로에도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백화점이 등장 하는데, 종로 네거리에 있던 화신백화점이다. 지물사업을 하던 박흥식이란 인물이 “화신상회”를 인수하여 신축 하였는데, 화신은 얼마 뒤 후발업체인 동아백화점을 인수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엉성한 상품전시와 서비스 정신의 몰이해로 늘 일본 업체들에게 고전했다.

 

당시 백화점의 최고 명물은 엘리베이터와 ‘쇼프 껄(shop girl)’ 여점원이었다. 특히 여점원은 단정한 용모와 학력 때문에 단연 일등 신부 감으로 떠올랐고, 입사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부잣집에서 며느리로 모셔가는 바람에 여점원의 입사 경쟁률이 600대 1을 넘어설 때도 있을 만큼 장안의 화제였다.

 

이렇게 우리가 소비문화에 홀려 넋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빠져 나가듯 이 땅의 재화들이 일본으로 솔솔 빠져 나가고 있었다. 당시 경성에 세워진 일본계 백화점만 네 곳이었고, 평양을 비롯한 주요도시에도 예외 없이 백화점 열풍은 불어 닥쳤다. 그 시절 소비수준으로 볼 때 인구 10만에 백화점 1곳이 적정 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경성인구는 이제 막 30만을 넘고 있었다. 단순논리로 계산하면 도저히 ‘화신’까지 포함한 다섯 백화점이 먹고 살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꾀가 없겠는가.

그들은 이미 경성 인근의 중부지방 전체를 “경성상권”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더불어 재래시장 고객들까지 흡수한다는 전략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방도시 공략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계산은 정교했고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 이전까지 일본계 백화점은 우리 중소상인의 몰락을 미소 띈 얼굴로 바라보면서 대호황을 누린다.

 

<백만 원이 생긴다면> - 김정구ㆍ장세정

 

(남)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며는

(여) 금비녀 보석반지 하나 살톄야 음-

(남) 그리고 비행기도 한 대 사놋치

(여) 하늘 공중 높이 떠(남) 빙글 빙글 돌아서

(남,여) 아서라 백만 원의 꿈을 꾸다가

         청춘의 인함박을 뒤집어 쓰겠오

 

(남)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며는

(여) 그란드 피아노도 한 대 살톄야 음-

(남) 요것이 욕심이란 부란당이야

(여) 안 사주면 난 싫여

(남) 울긴 또 왜 울어

(남.여) 이것 참 야단낫군 백만 원 꿈에

          부부간 가정대전 폭발이 되겠오

 

(남)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며는

(여) 인조견 적삼치마 해 이블톄야 음-

(남) 남은 건 막걸리나 죄다삽시다

(여) 그건 사서 뭘 해요

(남) 두고 먹지 무얼 해

(남.여) 아서라 헛소리에 헛꿈 꾸다가

          보리밥 비지찌개 다 식어 버렷네

 

영원한 국민가수 김정구는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인지라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음악을 접했다. 우리 가요계의 만능 엔터테이너 김용환이 큰 형님이고 성악가 김안나가 누님, 피아니스트 김정현이 동생으로 유명한 음악가족이었다. 36년에 여가수 최선과 이중창으로 <삼번통 아가씨>를 취입하며 입문했다. 38년에 나온 <눈물 젖은 두만강>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 받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난영, 신카나리아와 함께 유성기 시절 여성가수 삼두체제를 구축했던 장세정은 192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화신백화점 평양점에서 악기점 점원으로 있다가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37년에 발표한 <연락선은 떠난다>를 비롯하여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김정구와 장세정에 대하여는 훗날 자세히 다룰 예정임.)

 

<백만 원이 생긴다면>은 노래가 재미있어 그 뒤로도 많은 가수들이 취입한 우리나라 대표적 만요(희극적 대중가요)다.

 

*탈아입구론-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모델 삼아 선진국 대열에 들기 위한 구체적 이론.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ccrk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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