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의 고려불상을 찾아서

2021.03.06 11:21:27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경기도 이천의 옛 절터 답사는 관고동에 있는 석조여래입상부터 찾아 보기로 했다. 이천의 옛 절터 답사 역시 당일치기로 6~7곳을 둘러보아야 하는 일정이라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일산 집을 출발했다. 일요일이지만 다음날이 삼일절 공휴일이라서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관고동 석조여래입상까지는 1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답사 치고는 이른 시각이지만 서둘렀다.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자리는 예전에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소방서를 비롯한 사무실, 주유소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돌부처님을 일부러 찾아 나서지 않고는 지나치기 십상인 자리에 있었다. 다행히 석조여래입상 뒤쪽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마저도 없었다면 돌부처님은 아마 숨이 콱 막혔을 법했다.

 

 

“비교적 규모가 큰 불상이며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흘러내리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왼손을 아래로 향하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으로 향한 채 손목을 구부리고 아랫배에 붙이고 있다. 몸에 비해 손을 크게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불상의 높이는 4미터. 폭은 1.1미터이다. 고려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사지총람》 상권-

 

그러고 보니 이 부처님이 세상에 모습을 나투신 세월도 1000여년을 넘어섰다. 그러는 사이에 절은 사라졌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현 위치에 관고동 석조여래입상이 묻혀있었다고 하며 현재 경작지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 귀면 와편을 비롯하여 어골문, 격자문, 복합문, 기와편, 분청자편, 백자편 등 많은 유물이 수습된다”

 

《한국사지총람》 상권(2010)이 출간될 때만 해도 이곳은 농사를 짓던 경작지였나 본데 지금은(2021) 이곳이 경작지였음을 느끼게 하는 그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관고동 절터[寺址]의 석조여래입상(이천시 향토유적 제 6호)은 홀로 외로운 세월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어 찾아간 곳은 역시 관고동에 있는 영월암(映月庵)의 보물 제822호 마애여래입상과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대좌다. 영월암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문헌기록 등은 남아있지 않다. 이곳에는 높이 약 8미터의 자연 바위를 이용한 고려 초기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있다. 또한 불상은 없어진 채 석조 광배와 연화대좌(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가 남아 있다. 현재는 1980년에 새로 조성한 불상이 연화좌대에 안치되어 있다.

 

 

세 번째 들른 곳은 장암리 절터에 있던 보물 제982호 마애보살반가상이다. 이 마애보살반가상은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은 마장면 장암리 논밭 가운데 덩그마니 홀로 서 있었는데 서기 981년(태평2년)이라는 조성연대가 마애불 뒷면에 새겨져 있다. 네 번째로 찾아간 곳은 호법면 동산리에 있는 입석사터의 이천시 향토유적 제9호 동산리마애여래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 “입석사재호법리대덕산”이라는 기록으로 미뤄 이 불상이 세워져 있는 근처에 입석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은 아주 소박한 모습으로 고려 초기~ 중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어 다섯 번 째로 찾아간 곳은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의 소고리 마애여래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이다. 4.7미터 크기의 바위면에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마애여래좌상은 고려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되며, 바로 곁에 있는 마애삼존석불(이천시향토유적 제8호) 역시 자연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마애삼존석불은 지금도 영험이 있는지 중년의 여성 두 명이 과일 등을 공양물로 올리고 기도 중이었다.

 

 

여섯 번째로 찾아간 곳은 장호원읍 어석2리에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고려불 석조여래입상이다.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꽤 큰 불상은 머리에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불상의 한 유형이라고 한다. 꽉 다문 입 모양이 다른 불상에서 보지 못한 고집스런 모습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불상은 장호원읍 선읍3리에 있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 10호 석조여래입상이다. 어석리 여래입상처럼 보개(寶蓋)를 쓰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불상의 얼굴 부분은 원 모습이 아니고 1984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이 불상은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대좌, 불신, 불두, 보개 등 4 조각으로 완성된 것으로 통일신라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불상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978년 여름 장마 때 드러났는데 이때 머리 부분이 발견되지 않아 후에 새로 그 부분만 만들어 합체시킨 것이다.

 

 

당일 코스로 이천시의 옛 절터에 있는 불상을 찾아 다녔다. 이천시에 남아 있는 불상들은 대체로 통일신라말부터 고려초기를 거쳐 고려 중기의 불상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때는 번듯한 절이 있었고 그 경내에 조성되어 절을 찾는 이들의 돈독한 신앙의 대상으로 대접받았을 터이지만 1,0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절 이름도 절터도 알 수 없는 자리에 외롭게 홀로 서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조차 하다. 그 누가 있어 천년 뒤에라도 이 불상들이 숭모의 대상이 되는 시기가 도래할 수 있을는지 나그네의 발걸음이 무겁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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