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금으로부터 근 140년 전 어느 한때 서울의 종각 인근에서 둥지를 틀었던 한 미국 청년이, 어둠에 잠겨가는 조선왕국을 바라보며 애상에 젖은 글을 남겼다.
밤이 오면 어두운 남산 꼭대기, 봉수대(烽燧臺)의 불꽃이 줄지어 신속히 꺼진다. 남산의 봉홧불은 이 나라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뻗어 있는 제4 봉수로(烽燧路) 의 마지막 봉화다. 그 신호로써 사람들은 오늘밤 온 나라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산 맞은편 궁궐의 임금은 왕국의 평화를 알리는 이 무언의 메시지에 안도하며 침전에 들 것이다.
잠시 뒤 도심의 큰 종에서 울려 나오는 부웅, 부웅, 부웅 소리가 나의 귓전에 닿는다. 사람들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며 밤에는 성문이 닫힌다는 신호다. 이 땅에 밤이 내리면 이처럼 봉홧불이 신호를 하고 큰 종이 밤공기 속에서 부웅부웅 소리를 내온 지 4백 년이 넘었다!( The signal has flashed out nightly, and the great bell has boomed thus in the night air nightly for more than four hundred years! )
「출처: 카터 에커트(Carter J. Eckert) 하버드대 교수의 논고, JAHYUN KIM HABOUSH 편찬 《EPISTOLAR KOREA》의 235~236쪽, 2009 COLUMBIA UNIVERSITY PRESS)」
이 글을 쓴 조지 포크(George C. Foulk, 1856-1893)는 원래 미국 공사관의 해군 무관으로 임명되어 1884년 5월 31일 조선에 입국하였다. 처음엔 정동의 공사관에서 공사 부부와 동거했지만 그해 여름 강한 만류에도 짐을 싸서 공사관을 나왔다. 청계천(당시엔 ‘개천’이라 불렀음)의 갓전골(입동-笠洞)에 새로 지은 집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렇게 조선인의 바닷속으로 들어간 조지 포크는 조선인들과 같이 호흡하며 조선어를 쓰면서 그야말로 조선살이를 한다. 그의 집에는 밤낮없이 조선의 관리들과 친구들이 드나든다. 그는 곧 조선의 개혁가들과 의기투합한다. 특히 오늘날의 안국역 가까이 살고 있던 서광범(갑신정변 주역 가운데 한 명)과는 영혼의 단짝(soul mate)이 된다.
초대 공사 푸트((Lucius H. Foote, 1826~1913)가 1885년 초 이임한 뒤 후임 공사가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 포크가 대리공사가 된다. 이제 오나 저제 오나 하고 기다리는 후임 공사는 오랫동안 오지 않는다. 조지 포크의 대리공사직도 그만큼 길어진다. 공사관에 다른 직원은 한 명도 없다. 서기라도 한 명 보내달라고 본국 정부에 호소하나 무시당한다. 심지어 몇 달 분의 봉급이 지급되지 않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하여 조지 포크는 빚을 내어 살아야 했다.
미국 정부의 방기에 가까운 무관심과 무시, 조선 정부의 과도한 기대, 인적 재정적 곤경, 창궐하는 전염병 속에서 조지 포크는 조선과 양국관계의 발전을 위해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하면서 헌신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조선인과 조선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다. 그가 본국의 국무장관에게 보낸 절절한 호소이다.

“조선인들은 많은 면에서 청나라 사람들보다 단연코 우수합니다. 본인은 지난 두 해 동안의 조선 역사 공부를 통해, 그리고 조선인들과의 친교와 관찰을 통해, 조선의 과거 문명이 중국보다 더 높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조선인들은 가슴 깊이 이성적이고 너그럽고 진보적인 사람들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들은 서양인들의 공감과 관심(the sympathy and interest of Western people)을 끄는 특이한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까닭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언제나 그 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입니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조선은 결국 독립국이 되어야만 합니다(Korea must become an independent nation eventually, whatever troubles on the way). 그러기 위해서 조선이 필요로 하는 것은 청나라가 아니라 서양의 지원입니다. 조선인들은 선진 문명을 받아들일 자질이 있습니다.“(1886. 2. 20일 자 조지 포크의 국무장관 앞 공한)
고고학자가 잠망경을 쓴 채 해저에 가라앉은 난파선의 잔해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듯, 조지 포크는 몰락해 가는 조선왕조의 폐허 속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 한글이 있다. 지금 양화진에 묻혀 있는 헐버트의 한글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이름의 첫 한글 교과서를 쓴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조지 포크가 미국인으로서는 처음 한글과 한국어를 구사했다는 사실은 묻혀 있다.
어제 2025년(민기-民紀 1년) 6월 11일 나는 그가 1885년 전후에 조선 외무부서에 보낸 국한문 혼용의 문서들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그의 친필 한글 외교문서를 보고자 했던 갈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게 우리나라의 서울대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조지 포크의 손글씨 사례를 직접 보도록 하자.

믿어지는가? 이게 정말 1880년대, 20대 나이의 미국 군인이자 외교관이 직접 쓴 글씨란 말인가? 혹시 누군가에게 대필을 시킨 건 아닐까? 아직 대필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앞으로 고증해 보아야 할 숙제이다. 그는 한문을 알았으며 여기에서만 한글을 쓴 것도 아니다. 다른 자료에서도 그의 한글을 찾아볼 수 있다. 필적 감정 전문가들이 대조해 보면 이게 그의 친필인지 아닌지 쉽게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자료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버클리대 장재용 교수님과 서울대 규장각 관계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민기(民紀) 1년 6월 12일 아침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