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애기릉, 영회원

2021.08.27 12:41:43

소현세자비와 강빈 그리고 세 아들의 비운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71]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7호선 철산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올라오면, 바로 앞에 낮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능선은 바로 앞의 도덕산에서 시작하여 구름산 – 가학산 – 서독산으로 이어지며, 서독산에서 내려오면 서해안 고속도로 밑을 지나 바로 안양의 수리산 줄기로 올라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광명의 네 산을 광명 알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마 전에 광명 알프스를 걸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보팀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뭐에 관해 쓸까 생각하다가, 구름산 자락에 있는 사적 제357호 '영회원(永懷園)'이 생각났다. 영회원은 소현세자의 아내 민회빈(愍懷嬪) 강 씨의 무덤이다. 하여 13년 만에 다시 철산역에서 도덕산을 넘어 구름산 자락의 민회빈을 찾아간 것이다. 13년 전에 찾아왔을 때도 민회빈은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더니, 이번에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이번에도 영회원 옆을 따라 구름산으로 오르며, 나무들 사이로 힐끗힐끗 영회원에 잠들어 있는 민회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운의 세자비 민회빈 강 씨, 시호는 민회빈이나 사람들은 보통 강빈이라고 많이 부른다. 나도 강빈이라 부르겠다. 강빈은 청나라가 정묘호란으로 1차 조선을 휩쓸고 지나간 1627년 12월에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한 나라의 세자가 혼례 하는 것이니 경사스러운 일로 나라 전체가 축하해야 할 것이나, 가

례를 올릴 때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청나라를 형님 국가로 모시기로 굴욕적 강화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다.

 

그러니 강빈은 세자빈으로 출발하면서부터 행복이 활짝 피어나는 출발은 아니었겠다. 조선은 정묘호란에서 그렇게 청나라에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가 1636년 또다시 청나라의 침입을 받으니, 바로 병자호란이다. 정묘호란 때는 종실 원창군의 인질로 만족하던 청나라는 이번에는 세자를 인질로 요구한다. 이리하여 순탄한 결혼생활은 9년여 만에 끝나고, 소현세자 부부는 낯선 타국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소현세자 부부는 인질로 끌려간 기간을 그저 낙담과 비탄 속에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강권으로 북경까지 가 명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하면서 그동안 조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청나라의 요구에 맞서 외교적으로 조금이라도 조선에 유리한 결과를 끌어내려고 노력한다. 이런 소현세자를 청나라는 호의적으로 보고 볼모로 업신여기기보다는 조선의 왕세자로서 대접을 해주었다. 이러니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는 소현세자를 통해야 해결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강빈도 그저 조용히 세자빈으로서 소현세자를 내조하는데 머무르지 않는다. 볼모로 있는 동안 강빈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온다. 청나라는 처음에 소현세자 일행의 식량을 대주다가, 나중에는 직접 농사지어 먹으라고 한다. 이때 강빈이 활약하는 것이다. 강빈은 청나라가 준 토지를 개간하고 조선의 농법을 도입하여 단순히 자급자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잉여농산물을 남겨 이를 판매까지 한다. 그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이 탐낼 만한 것을 조선에서 들여와 판매하여 이득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외교는 소현세자가, 경제는 강빈이 맡아서 활약을 하였다고나 할까? 아마 강빈이 현세에 태어났더라면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큰 기업을 일구었을 것 같다. 그럼 강빈은 이렇게 축적한 이득을 어디에 썼을까? 당시 청나라에는 많은 조선인이 끌려와 노비로 고생하고 있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임금을 잘못 만난 죄로 아무 죄도 없이 끌려와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빈은 벌어들인 돈으로 많은 백성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주었다.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가 이렇게 청나라에서 활약을 하는 것에 기뻐했을까? 당연히 그랬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인조는 청나라에 우호적인 소현세자의 행동에 불만에 더하여 불안감까지 들었다. 이러다가 청나라가 자신을 쫓아내고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앉히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까지 든 것이다. 인조의 불안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고려 때 원나라가 충선왕을 내쫓고 충렬왕으로 임금을 교체한 전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인조이니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아담 샬로부터 서양의 과학기기와 서적 심지어는 천주학에 관한 책까지 선물 받아 온 것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급사하는데, 사인은 약물 중독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인조가 독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 아들을 이렇게 독살하는데, 며느리라고 온존하겠는가? 강빈이 청나라에 있는 동안 아버지 강석기가 사망하였다. 그런데 인조는 아버지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강빈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예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쫓아버린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강빈을 세자빈에서 쫒아내더니 그다음 해 강빈이 자신을 독살하려 하였다는 누명을 씌어 사약을 먹인다. 임금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이니 그 화가 강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강빈의 노모와 형제자매들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누명을 쓰고 죽은 강빈의 무덤이니 처음에는 버려지다시피 하였는데, 숙종은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인정하여 강빈을 복위시켜주었고, 강빈의 무덤을 ‘민회묘’라고 하였다. 그 뒤 고종은 강빈의 무덤을 영회원으로 승격시켜준다.

 

사람들은 강빈의 무덤을 영회원이라는 정식 명칭을 놔두고 ‘애기릉’이라고 부른다. 강빈이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기에, 이를 애석하게 여겨 왕릉에 준하여 애기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애기릉이라고 불리는 무덤이 더 있다. 바로 의안대군 방석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방언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이지 않는가? 방석이 17살의 나이에 이복형의 권력욕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은 이를 안타까이 여겨 의안대군 방석의 무덤도 애기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제 애기릉을 뒤로 하고 다시 구름산으로 오른다. 구름산 위로 구름 몇 조각이 떠간다. 강빈이 죽임을 당한 뒤 강빈의 세 아들 석철(12살), 석린(8살), 석견(4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석철, 석린은 얼마 안 되어 죽었고, 살아남아 제주도를 빠져나온 석견도 22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저 구름조각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강빈이 세 아들과 행복 여행을 떠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강빈이여! 저 하늘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 누리소서!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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