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눈 길
눈 위에 남긴 까마귀 발자국 (돌)
흰 눈 맞으며 무얼 찾고 있나 (달)
분별없는 바탕 자리 가는 길 (초)
흰 종이에 글 쓰듯 함 없는 함 (심)
... 25.2.6. 불한시사 합작시
눈 위에 남긴 까마귀 발자국은 잠시의 흔적이다. 한 번의 날갯짓, 한 번의 디딤이 남긴 자국은 찰나의 존재 증명처럼 보이지만, 해가 기울고 기온이 오르면 이내 스스로 자취를 지운다. 발자국은 ‘있음’이면서 동시에 ‘사라짐’의 예고이며, 남김이 곧 소멸로 향하는 길임을 드러낸다. 서산대사의 ‘답설(踏雪)’ 선시가 일러주듯, 눈 위를 밟고 간 자는 발자국을 남기되 마음에는 남기지 않는다. 흔적은 생기나 집착은 두지 않는 것, 이것이 ‘설중보행(雪中步行)’의 수행적 태도다.
눈은 더러운 지표를 가리지 않고 덮는다. 얼어붙은 산하와 혼탁한 세상 위에 내리는 흰 눈은 미화가 아니라 ‘일시적 평준화’다. 덮음은 곧 드러냄의 다른 얼굴이다. 잠시 고요를 주지만, 그 고요는 해빙과 함께 본래의 결을 다시 드러낸다. 그러므로 눈은 정화의 상징이면서도 무상(無常)의 표식이다. 씻김은 지속되지 않으며, 맑음은 붙잡을 수 없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던 설경—발해를 건너 베이징의 공항으로 내려앉던 순간, 자욱한 눈발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흐리게 하던 장면은 이동하는 자의 의식에 ‘사이의 시간(時間)’을 열어 준다. 한반도에 내리던 눈이 대륙에도 이어지고, 얼어붙은 지표 위에 다시 흰 면(面)이 포개질 때, 세계는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연결 역시 잠정적이다. 눈은 이어지되 녹는 속도는 각자의 자리에서 다르다. 같은 흰빛 아래서도 각기 다른 소멸의 시간을 산다.
스승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면과 설면 중에 어느 것이 더 오래 맑게 희더냐—(水面之白 雪面之白, 白而白而 誰久淸白).” 물의 흰빛과 눈의 흰빛, 둘 다 흰데 어느 쪽이 오래 맑음을 지키는가. 물의 흰빛은 반사된 빛의 순간이고, 눈의 흰빛은 쌓인 결정의 순간이다. 둘 다 ‘흰’이라는 동일한 인상을 주지만, 지속성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속의 우열이 아니라, 흰빛이 일어나는 조건이다. 물은 흔들림 속에서 빛나고, 눈은 정지의 형상으로 빛난다. 움직임의 흰빛과 멈춤의 흰빛 - 이 둘은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완이다."
심(心)은 물처럼 청정 위에 빛을 반사하고, 물(物)은 눈처럼 형상을 빚어 잠시 머문다. 마음의 파동이 형상을 낳고, 형상의 잔향이 다시 마음을 흔든다.
까마귀 발자국을 따라 무엇을 찾는가. 찾음은 분별을 낳고, 분별은 길을 굳힌다. 그러나 설중의 길은 늘 사라지는 길이다. ‘함 없는 함’—흰 종이에 글을 쓰듯 붓을 들되, 글자에 매이지 않는 태도는 무위(無爲)의 실천적 형식이다. 쓰되 붙들지 않고, 남기되 소유하지 않으며, 걸어가되 도착을 독점하지 않는다. 눈 위의 행보는 그러한 무위의 연습장이다.
결국 눈길의 미학은 흔적을 남기되 흔적에 머물지 않는 것에 있다. 남김은 관계를 만들고, 사라짐은 집착을 풀어준다. 이 왕복 운동 속에서 마음과 사물은 서로를 비춘다. 마음이 고요하면 사물은 투명해지고, 사물이 투명하면 마음은 비친다. 흰 눈은 그 잠정적 투명의 장(場)이다. 오늘의 설경은 오늘의 가르침이며, 내일의 해빙은 내일의 이별이다. 우리는 밟고 지나가되, 발자국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그때의 깨어있음뿐이다. (북경에서 라석)
| ㆍ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