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맹사성의 ‘공당문답’

2022.02.24 11:44:32

정계의 음유 시인 맹사성- ②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7]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황희와 더불어 번영 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맹사성(孟思誠)이다. 그는 태종과 세종 사이 6조를 두루 걸치며 참판과 판서를 지냈고 세종 9년(1427)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맹사성은 1360년(공민왕 9) ~ 세종 20년(1438)까지의 문신이다.

 

그는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했으나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전 게재에 이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430년(세종 12년) :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하물며 아악은 중국 역대의 제작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黃鍾)의 소리도 또한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정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나 하례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황종(黃鍾)의 관(管)으로는 절후의 풍기(風氣) 역시 쉽게 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가 동쪽 부분에 있어 춥고 더운 기후 풍토가 중국과 현격히 다른데, 어찌 우리나라의 대[竹]로 황종의 관을 만들어서야 하겠는가. 방금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의하고 있고, 또 역대의 응후(應候)를 상고한 것도 보았으나, ... 송나라의 악기도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악공(樂工) 황식(黃植)이 조정에 들어와 아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니, 장적(長笛, 호적)ㆍ비파ㆍ장고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색상 선택...한 향악(鄕樂)을 섞어 썼던 것이다." 하니, 우의정 맹사성이 대답하기를, "옛글에 이르기를, ‘축(柷)을 쳐서 시작하고, 어(敔)를 쳐서 그치는데, 사이로 생황과 용(鏞, 쇠북)으로 연주한다.’ 하였다 온즉, 사이사이로 속악을 연주한 것은 삼대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12/9/11)

 

우리 음악인 향악을 보편화하려는 세종의 자주의식을 엿볼 수 있다.

 

1431년(세종 13년) : (호군 박연이 여러 의식의 음악 사용에 대해 글을 올리다.) 대호군 박연(朴堧)이 글을 올리기를, "옛날 제도에, 모든 제사에 있어 사람과 귀신을 제향하는 음악과 신을 보내드릴 적에는 모두 황종궁(조선시대 중심음)을 사용했으니, .... 전정에서 조회할 때 임금이 대부분 황종궁을 사용하는 것은, 대개 황종이 12음률의 첫소리가 되어, 여러 음률이 모두 황종에서 나오게 되니, ... 임금이 대개 황종을 쓴 것은 오로지 임금을 높이기 때문에 이를 구별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 고선궁(황종궁을 조 옮김 한 으뜸음)으로 고쳐 사용하여 제후의 법도를 빛나게 하시고, 전하의 출입에 황종궁을 사용하고, 세자와 군신의 예배에 고선궁을 사용하게 하여, 한결같이 초하룻날 의식과 같게 하여 군신의 분수를 밝히소서. 또 조칙(임금의 명령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적은 문서)을 맞이하는 예는, 조칙이 근정문에 들어오면 황종궁을 연주하고, 전하께서 군신을 거느리고 예를 행할 때는 고선궁을 사용하소서. 성절(임금의 생일을 축하하는 명절) 하례에는 전하의 출입과 예배에도 또한 고선궁을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신상ㆍ맹사성ㆍ황희 등은 옳다고 하고, 정초는 아뢰기를, "황종궁이 천자에 소속되어 제후는 사용할 수 없다면, 전하의 평상시에도 또한 사용할 수가 없사온데, 지금 이미 이를 사용하고 있은즉, 천자가 하늘에 제사하고, 종묘에 제향하고 출입할 때 모두 황종을 연주하게 되니, 비록 정조ㆍ동지ㆍ망궐례(명절 때나 임금ㆍ왕비의 생일에 각 지방의 관원이 ‘궐-闕’ 자를 새긴 나무패에 절하던 의식)ㆍ칙명을 맞이할 때도 이를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고, 허조는 아뢰기를, "원컨대,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의 용악(用樂) 제도를 자세히 상고한 뒤에 의견을 아뢰겠나이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에 따랐다. (《세종실록》13/11/5)

 

1432년(세종 14년) : (상정소에서 태종ㆍ태조에 대한 문무ㆍ무무의 가사에 관해 아뢰다.) 황희ㆍ맹사성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바라옵건대, 태조 임금의 문덕을 찬미하여 등가(登歌, 종묘제례 때 연주하는 음악)로 하고, 뛰어난 무예를 무무(武舞, 종묘제례 때 창과 방패를 들고 연주하는 음악)로 하고, 태종의 성덕과 신공(神功)을 찬양(讚揚)하여 가사를 지어서 문무(文舞, 종묘제례 때 문관의 복색을 입고 추는 춤)로 하고, 풍악을 연주하는데 이르러서는 먼저 등가(登歌)를 연주하여 문무를 추고, 다음에 헌가(軒架)를 연주하여 무무를 추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세종실록》14/9/1)

 

등가(登歌, 종묘제례 때 대궐의 대청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 헌가(軒架, 종묘제례 때 대청 아래에서 연주하는 아악) 때 문무와 무무의 순서를 조선 건국의 배경에 따라 무무를 먼저 하는 것으로 조정하였다.

 

세종 14년(1432)에 좌의정에 오르고 세종 17년에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에 욕심내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맹사성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번 그의 집 앞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이런 소탈한 그에게 자연스레 일화도 여럿 따라다닌다.

 

공당문답

 

조선 세종 때에 명상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은 황희 정승과 함께 조선 청백리의 양대산맥의 한 축을 이루며 오늘날까지도 청렴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맹사성은 평소 성품이 소탈하고 검소하여 백성들과 어우러져 백성들과 같은 평복을 즐겨 입어 사람들은 그가 정승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일화가 여럿 있는데 그 중 ‘공당문답’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맹 정승은 충남 온양 출신으로 고향에 내려갈 때면 평복차림에 홀로 검은 소를 타고 내려가 관청에 들리지도 않고 돌아오곤 했는데, 하루는 한양으로 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용인의 여관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주막여관의 특실에는 먼저 온 영남의 부잣집 자제가 호화스레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는 의정부 녹사 시험을 보려 한 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궁색한 행색의 맹정승을 보자 건방을 떨며 말 잇기 놀이를 제의하게 되었고, 이에 소탈한 맹정승은 쾌히 승낙하게 되었다. 막힘없이 문답을 주고받되 묻는 말끝에는 반드시 ‘공’자로 끝내고, 대답하는 말은 ‘당’자로 끝내기로 했다.

 

먼저 맹 정승이 먼저 시작했다. ‘젊은이는 무엇 하러 한양에 가는공?’ 하고 묻자, 선비가 ‘녹사 벼슬 시험 치러 간당’ ‘내가 뽑히도록 해 줄 공?’ ‘에끼! 촌로 주제에 말도 안 된 당’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맹정승은 의정부 시험 면접관으로 앉아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응시생으로 들어왔다.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았지만, 젊은 선비는 설마 전날 주막에서 만났던 촌로가 시험관일 줄은 꿈엔들 생각할 수 없었다. 맹사성은 젊은이를 놀려 주기로 마음먹고서 지난날 주막에서처럼 농 삼아 묻게 되었다.

 

맹 정승이 ‘이곳에 와보니 어떤공?’ 하자 깜짝 놀란 선비가 그때야 그 촌로가 맹 정승인 줄 알고 이젠 죽었구나! 생각했다. 기왕에 낙방할 바에 할 말이나 하고 죽자 생각하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죽어 맞당, 죽어 맞당’하고 조아렸다. 좌중이 갑작스러운 일에 어리둥절해야 했고 맹 정승이 그간의 이야기를 해주자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맹 정승은 젊은 선비가 경솔하기는 해도 기품과 재치가 있어 쓸 만하다고 여겨 그를 특별히 채용하여 총애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맹사성의 풍류와 재치 그리고 소탈한 성품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다.

 

이 밖에도 평소에 집에서도 퉁소를 즐겨 불어서 맹사성을 찾아온 사람들이 집 밖에서 퉁소 소리를 듣고 맹사성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다. 《세종실록》의 졸기(죽은 이에 대한 평가)에도 '음률에 능해 스스로 악기를 만들 줄도 알았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야사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세종이 음악에 연관된 일을 논의할 때면 맹사성과 상의하는 일이 잦았다. 음악에 정통한 재상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