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2만6천여 명 포로들을 죽여

2022.03.20 11:32:58

박태석 변호사 《일본의 노예》, ‘바탄 죽음의 행진’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89]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자행하고, 조선의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것을 보면 일본군이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인들 제대로 지켰겠습니까? 박태석 변호사는 《일본의 노예》에서 일본군의 포로 학대에 관해서도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말하렵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한 뒤 1942. 4. 9. 약 8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필리핀 포로들을 루손섬의 마리블레스와 바각에서 바탄의 필라까지 도보로 이동시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합류한 포로들을 북쪽 산페르난도로 행군시킨 뒤, 산페르난도역에서 기차에 싣고 카파스까지 이동합니다. 기차에서 내린 후에는 마지막으로 캠프 오도넬까지 이동시키는데, 포로들이 보두 걸은 거리는 96.6km에서 112km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포로들이 캠프 오도넬까지 이동하는 동안 많은 포로가 죽어 나갔기에, 이를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은 행군 도중 포로들에게 음식이나 물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 많은 포로가 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햇볕 치료는 해주었답니다. 햇볕 치료라고 하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치료는 해주었나 보다’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닙니다. 이것도 고문의 일종입니다. 열대의 태양빛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이렇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포로들을 모자도 씌우지 않고 앉게 하는 것입니다.

 

지켜보고 있던 일본군은 물을 달라고 호소하는 포로들에게는 물 대신 총알을 선사했구요. 그리고 트럭은 지쳐서 쓰러진 포로들을 그대로 타고 넘어갔답니다. 또한 ‘청소 담당 군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청소하는 것은 지쳐서 더는 걸을 수 없는 포로들을 살해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필리핀군 1, 11, 71. 91사단 포로들을 호송하던 일본군 65여단 122연대는 펜틴간 강가에 이르렀을 때 350~400명을 총과 대검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포로들을 상대로 총검술 훈련을 한 것인가요? 이 대학살에서 살아난 마누엘 얀 중위는 나중에 필리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는군요. 산페르난도에 도착하여 기차를 탔다고 하여 포로들의 형편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닙니다. 포로들은 공기 순환이 안 되는 열차에 차곡차곡 실린 뒤 온종일 실려 가면서 죽어 나갔습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약 8만 명의 포로들이 행진을 시작했으나, 캠프 오도넬에 도착하였을 때는 오직 54,000명의 포로만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도주한 포로들이 많아서 그랬다고 변명하는데, 도주한 포로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을 알게 된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샬 장군은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합니다.

 

“무력한 포로들을 상대로 한 이러한 잔인한 보복들은 일본인들이 그동안 저질러 온 야만성으로부터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가운데 줄임) 우리는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일본의 군사 정치 지도자들에게, 일본 민족 자체의 미래는 전적으로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그 원시적이고 야만적 본능을 넘어서서 발전하고자 하는 일본 민족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박 변호사는 이를 보고, 중세 봉건주의 시대부터의 인취와 난취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전쟁 관습이 근세에 왜구의 노예사냥과 임진왜란의 조선인 납치 만행을 거쳐, 현대의 일본 제국의 군대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일본 군대가 이런 못된 것만 배워 국제사회의 인권 규약을 무시하고 만행을 저지른 것인데, 마샬 장군이 통쾌하게 이를 꿰뚫어 보았다고 평합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아무래도 일제의 야만적 행위는 어느 날 돌발적으로 일어난 행위가 아니라, 중세 봉건주의 시대부터의 뿌리 깊은 야만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처벌로, 전후에 그 당시 지휘관이었던 혼마 마사하루 장군과 그의 부하 요시타카 카와네, 쿠라타로 히라노는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재판 당시 마사하루는 죽음의 행진이 끝난 2달 뒤에서야 그렇게 많은 포로가 죽은 것을 알았다고 변명하는데, 이런 놈이 장군이었다니... 설사 자신이 나중에 알았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으로서는 변명할 것이 아니라 참회를 하고 죽은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사형을 떳떳하게 받아들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때 같이 재판을 받았더라면 틀림없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장교 하나는 탈출하여 사형을 면했습니다. 츠지 마사노부라고 작전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놈인데, 이놈이 바탄의 행진 중에 포로들을 살해하도록 직접 명령을 내린 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놈은 전쟁이 끝나자 태국에서 승려로 변장하여 베트남을 거쳐 중국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1949년 일본으로 잠입하여 탄광 노동자로 숨어 지내다가 1950년에 도주 중의 기록인 《잠행 삼천리》를 발표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세를 활용하여 반공주의자로 변신했고, 1965년까지 자민당 중의원과 참의원을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이런 놈들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살아남을 뿐 아니라 더욱 출세까지 하는군요. 그런데 이놈은 이런 학살만 한 것이 아닙니다. 츠지 마사노부는 1943년 파푸아 뉴기니의 라바울에서 동맹 통신의 특파원 오노다 마사와 대담을 하면서, 특파원에게 허리에 차고 있던 바짝 마른 검은 통을 보이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건 미군의 간이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를 핥으며 연명했다.” 상징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미군 포로의 간을 먹은 것은 물론 인육을 먹은 것을 자랑스럽게 말한 것입니다.

 

이런 놈을 처벌하지 않고 국회의원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본 사회의 풍토가 전율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로 도망간 아돌프 아이히만을 끝까지 추격, 1960년 5월 체포하여 이스라엘로 끌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 후 아이히만은 재판을 받고 1962. 6. 1. 사형에 처해졌구요. 일본이 정말 양식이 있는 국가라면 이렇게 전쟁범죄자를 처벌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설사 처벌은 못 하더라도 국회의원까지 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도(神道)라고 하여 온갖 잡신들을 믿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한계인가요?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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