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밖의 넓은 세상을 쓴 《탐라문견록》

2022.07.15 11:50:16

‘서울책보고’에서 건진 쓸만한 책 한 권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9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저는 아산병원에 문상갈 때 잠실나루역에서 내려 성내천을 건너갑니다. 성내천변을 따라 걷는 맛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잠실나루역 근처에 있는 헌책방을 둘러보는 맛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책보고’라고 서울시가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www.seoulbookbogo.kr)인데, 여기에 30개 가까운 헌책방이 입주하여, 저마다 서가를 차지하고 각자 소장한 책들을 보여줍니다. 책들이 주제 별로 꽂혀있지 않고 헌책방별로 꽂혀있는 것이 조금 흠이긴 하나, 각자의 헌책방 서가마다 돌아보는 맛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문상가면서 ‘서울책보고’를 들렀는데, 여기서 《탐라문견록》이란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탐라문견록》이란 1731년 9월 정운경(1699~1753)이 제주에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정운경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정필녕을 따라 제주에 와서 《탐라문견록》을 남긴 것이지요. 《탐라문견록》에는 정운경이 제주 전역을 여행하고 쓴 여행기와 제주의 특산물인 귤을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한 글도 있지만,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풍랑을 맞아 이국으로 표류한 제주도민의 이야기를 기록한 표류기입니다.

 

 

바다를 소홀히 하여 공도(空島) 정책까지 펼친 조선에는 바다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기에 《탐라문견록》은 그만큼 귀중한 기록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최부의 《표해록》, 장한철의 《표해록》 그리고 정약전이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쓴 《표해시말》이 조선의 3대 표류기로 일반에게 많이 알려졌지요. 그런데 정민 교수가 정운경의 《탐라문견록》을 발견하고 2008년에 이를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책을 보니 많은 제주도 사람이 표류하였더군요. 그랬겠지요. 그 옛날 그 조그만 배를 타고 거친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한 것이었을 테니까요. 오죽했으면 제주에서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바다에 바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하였겠습니까? 제주에 해녀들이 많은 것도 제주 여인들이 생활력이 강한 것도 있겠지만,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정네들을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요.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100년 동안만 하더라도 일본으로 표류해온 조선인이 공식기록으로 남은 것만 409건에 표류민의 숫자도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하고, 비공식적인 것까지 합치면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게나 많이!!! 이렇게 많으니 나중에 표류해온 사람이 먼저 표류해온 사람 가운데서 고향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하기도 하였다는군요. 분명 그렇게 많은 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고생했는데, 우린 그런 선조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습니다.​

 

《탐라문견록》에는 모두 15건의 표류기가 실려있는데, 그 가운데 제 눈에 띄는 것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공통적인 것이 표류민들이 제주도 사람인 것을 숨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왜? 1612년에 유구국(오끼나와) 태자가 탄 상선이 제주에 표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주 목사 이가빈과 판관 문희현 등이 이 상선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그들을 죽였다는군요.

 

아니? 유교국가에서 어떻게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바다를 무시한 조선의 관리들 행패에 혀를 차게 되는군요. 비록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이지만 결국 인접 국가에 이런 소문은 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표류한 제주도민은 보복이 두려워 제주도민을 숨기려고 애를 쓴 것이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조선의 표류민이 제일 많이 표착하는 나라가 일본이니까, 일본에서는 조선인 송환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이 표류해오면 모두 나가사키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송환되는 것이지요. 일본의 조선 표류민에 대한 태도는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일정량의 식사도 주고,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후예들을 통사(通事)로 고용하여 통역하도록 했구요.

 

표류민들은 낯선 나라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우리말을 하는 조선인을 만나니 옛친구를 만난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우리말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기에 우리 말을 잊지 않았고, 평소에도 망건과 상투, 패랭이를 하며 옛 습속을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탐라문견록》을 보니 제일 멀리 표류한 사람은 1687년에 베트남까지 표류한 고상영 일행입니다. 이들은 베트남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는 중국 상선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이들의 배를 압수하고 중국 상인들을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은으로 보상은 해주었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배를 압수하고 육로를 통해 돌아가게 하다니요. 정말 조선은 바다에 대해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었군요. 청나라 황제도 이 소식에 어이없어하며, 조선 정부에 이후로는 배가 있을 때는 바다를 통해 돌려보낼 것을 법식으로 삼게 했다는군요.​

 

그리고 1729년에 표류한 고완의 일본 오도 표류기를 보니, 표류 원인이 특이하네요. 지나가던 고래가 배를 등에 지는 바람에 배가 기우뚱하며 몹시 위태로웠답니다. 그러다가 키의 끝부분이 고래 몸통에 부딪히자 고래가 놀라서 꼬리로 물결을 치더니 갑자기 잠수하여 가버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파도가 소용돌이치면서 사면에서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배가 난파된 것이지요. 고래가 일부러 배를 공격한 것인가요? 아마 숨을 쉬러 바다 위로 올라오던 고래가 하필이면 배를 등에 짊어지는 바람에 이런 비극이 생긴 것이겠지요. 고완 일행으로서는 재수가 없었던 것이네요.​

 

정민 교수가 번역한 책의 제목은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입니다. 당시 조선이 아무리 바다에 대해서는 무식하였다지만, 수많은 사람이 표류하며 바다 밖 넓은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에 관해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에 출몰하는 일본배를 쫓아 일본까지 가서 재발 방지 약속까지 받아 돌아온 안용복을 사형에 처하려던 조선 정부입니다. 《탐라문견록》에 ‘바다 밖의 넓은 세상’이란 제목을 덧붙인 것에서 정민 교수의 그런 아쉬움도 묻어나는 듯합니다.

《탐라문견록》! 이번에도 ‘서울책보고’에 갔다가 쓸만한 책 한 권 건졌습니다. 다음에 아산병원 문상 갈 때는 또 어떤 책을 건질 수 있으려나?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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