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하, 그는 진정 남사당놀이의 화신인가?

2022.12.13 11:45:16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0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과거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과 평택, 충남 당진, 대전시 대덕, 전남 강진과 구례, 경남 진주와 남해, 황해도의 송화와 은율 등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대부분 물산이 집결되고, 유통되던 시장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연희의 판이 성공될 확률이 높았던 곳이었다. 지난주에는 남사당의 제6종목 <인형극> 곧 <덜미>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지운하 명인 어떻게 풍물굿을 배우게 됐는지 얘기를 해 보려 한다.

 

<남사당놀이>의 주 내용은 지배층 구조에 항의하거나, 그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종목은 1964년도에 처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남사당의 나머지 5종목 모두를 갖추게 되면서 그 이름도 <남사당놀이>로 지정받았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35여 년이 지난 현재, 이곳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새로운 남사당 예인들의 발굴이나 젊은 예인들의 양성 사업이 활발치 못해서 점점 침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음악계나 춤, 연희계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들이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 한 줄기 빛이라고나 할까? 다행한 일이라고 한다면,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활동해 오던 지운하, 남기문 등 옛 남사당의 젊은 명인들이 인천 지역에서 새롭게 남사당 재건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남사당 연희 종목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사업으로<인천 남사당보존회>를 조직하고 교육 훈련, 학술 세미나, 출판 사업, 전통문화의 체험, 전문 인력의 양성, 교육프로그램의 개발 사업 등을 진행해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문득, 오래전에 지운하 명인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 기억되어 그 일부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문화타임즈>라는 인터넷 신문의 문화광장이었다. 글쓴이와 마주 앉은 그는 풍물과 만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이었어요. 저는 인천이 고향입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이 농악을 자주 치셨기 때문에 그 장구가락이나 쇠가락을 노상 듣고 자랐지요. 인천 숭의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였으니까, 아마 제가 8살 먹었던 어린 시절일 겁니다. 마침 학예회를 준비할 때였는데, 그때는 학교마다 학예회를 한다면 제법 시끌벅적했잖아요?” 그의 이야기가 점점 속도를 내며 커지고 있었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던 연극 속에 농악의 상모 돌리는 역할이 있었는데, 연출격의 여자 친구가 저에게 '네가 맡으면 멋지게 해 낼 것 같으니 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하는 거예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무조건 하겠다고 대답하고, 열심히 상모 돌리는 연습을 했지요.”

 

“그래서 잘했나요?”

“어려서부터 들어오던 농악의 가락들이 제 몸속에 숨어 있었고, 장단에 맞추어 돌리면 되는 것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열심히 해서 박수도 받았고, 연극 공연도 대 성공적이었지요.”

 

“이후 큰 대회에도 참가했다고 들었는데?”

“네, 그 뒤 12살 무렵인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 팀으로 출전해서 팀이 대통령상을 받는데 일조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요. 까마득한 옛이야기입니다.”

 

당시 지운하 명인은 학교에서 풍물을 배웠다고 했다.

“그때가 전쟁 직후여서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풍물을 꽤 좋아하시던 교장선생님이 박산옥(朴山玉) 명인을 선생님으로 모셔 놓고 저를 비롯하여 초등학교 1년생 5~6명이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 뒤, 점차 확대된 우리 학교 풍물단은 1958년, 1959년 경기도 대표 팀으로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이었는데 사당패의 풍물을 배우러 다닌다고 하면, 집안의 반대도 있을 법 한데? 라는 질문에 “제가 재미있다고 하고, 열심히 배우니까, 부모님의 반대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라고 응수한다. “일류 학습꾼(선생님)들을 모신 사당패에서 학채(학비)를 내고, 정식으로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박산옥 선생에게 채상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2살 무렵부터는 김문학(김덕수의 아버지) 문하에서도 수학을 하며 줄타기를 뺀 전 종목의 기능을 배웠다”라고 엊그제의 경험담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떤 때는 상자 안에 장비를 다 넣어 머리에 얹거나 메고, 남사당 단체를 따라다니며 ‘장바이’(마을의 장터공연)도 다녔지요. 수학한 지 20여 년 만에 최성구 선생에게 꽹과리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꽹과리 잡는 데 20년 걸렸다는 뜻은 삐리(초보자)가 원한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꽹과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위계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지요.”

 

지 명인은 겸손하다는 평판과 함께 선배를 깍듯하게 모신다고 하는 칭찬이 자자한 편이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위계질서가 엄격한 단체생활을 통하여 윗사람의 역할과 아랫사람의 역할을 배우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곧 생명으로 알고 따랐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고 간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기본질서가 무너지면 그 조직은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사당놀이에서는 각 단계의 전통이 있는 만큼, 선생님과 선배님은 하늘 같이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분들이 존재함으로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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