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지 이제 세 해째를 맞는다.
깡촌의 강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때 서울로 간 나는 음악을 좇아 이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접고 30대 시절에 그곳을 떠났었다. 몇몇 지방도시를 전전한 끝에 강릉에다 짐을 풀고 이십 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십여 년을 또 살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향에서 보낸 기간보다 타향살이 기간이 몇 곱절은 길다.
그런 까닭인지 고향보다는 타관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서울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감수성이 한창인 청소년기를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우리 가족은 이 개천가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지금의 광교 쪽 일부 구간을 뺀 나머지는 복개되기 전이었고 한국전쟁 직후 빈곤의 그림자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하류 쪽으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은 말이 집이지 그저 비, 바람이나 근근이 가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치면 맞을 것이다. 바깥벽과 지붕은 판자로 틀을 잡은 뒤 방수종이인 루핑으로 처리하고 방과 방 사이의 벽은 골판지로 막아 구분을 지었다.
단돈 만 원도 안 되는 돈을 쥐고 서울로 간 우리 모자는 서울에서 가장 집세가 싼 곳을 찾아 그곳으로 흘러들었다.
우리가 세 든 집은 그야말로 잠만 자는 합숙소였다. 부엌도 없이 혼자 누우면 딱 맞을 쪽방만 달랑 빌려주었다. 전등도 벽에 구멍을 뚫어 옆방과 같이 사용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땐 마침 벽의 골판지가 찢어져 있어 장난기 많은 나는 골판지를 들추고 옆방으로 머리를 들이밀어 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당장 입에 풀칠할 걱정에 밤을 새우는데 나는 처음 맞닥뜨리는 환경과 문물이 신기하기만 해 들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공동수도도 구경거리였고 네 개에 일원 하는 바가지 과자나 구루마에서 파는 콘 아이스크림도 내가 사는 골목의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그 가운데서 가위 압권이라 내세울 만한 것은 공중변소로 아마 서울에서 가장 먼저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한 동네일 것이다. 개천 복판쯤에 나무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판자 조각으로 변소를 짓고 까치집 같은 다리로 뚝방과 연결해 놓았다. 대소변을 보면 바로 냇물로 떨어진다. 그러니 볼일은 보면서도 물 흘러가는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운치(?) 있는 장소였다. 물론 가물 때는 물 흐름이 약해져 곤란하긴 했지만.
서울 가서 수돗물 마시고 공깃밥 먹으면 뽀얗게 살이 오를 것이라는 환상이 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호기심은 많았지만, 겁은 적었던 나는 어머니가 나의 행동구역을 골목 안으로 제한해 놓았음에도 수시로 월경(越境)하여 큰길로 진출하여 쏘다녔고 마침내는 다리 밑 세상까지 목격하기에 이른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할 정도로 시커멓고 걸쭉한 냇물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다리 밑에.
다리 상판을 지붕 삼아 축대를 등지고 삼면에 가마니를 두른 토막집에 한 가족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하루살이 쪽방에 사는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졌고,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음을 그 어린 나이에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는 몇 년을 더 그곳에서 살았고 뤼프케 서독 대통령의 방한 때 판자촌이 강제철거 되면서 그곳을 떠났다.
나는 요즘도 서울에 가면 거의 청계천 주변에서 논다.
인사동과 낙원상가 주변, 특히 순대국밥골목은 필답구역이고, 세운상가에 들러 전축바늘도 사고 광장시장에 가서 빈대떡에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나면 배가 남산만 해진다. 그러면 배를 꺼뜨리기 위해 청계천 시냇가를 걷는다. 동묘와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눈요기를 하고 중고음반가게에 들어가 음반도 몇 장 사고 창신동, 숭인동 일대를 걸으며 열심히 필름을 되감아 본다. 하지만 50년이 넘는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아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시멘트로 덮였던 청계천을 되돌려 놓았다고는 하나 그때 그 모습이 아니요, 주변이 너무 바뀌어 그때 판자촌이 있던 자리를 더듬기가 쉽질 않다.
따지고 보면 나의 추억 태반이 청계천과 연관 지어진 것들이다.
복개되기 이전에 둔치에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들. 그곳의 “각기우동*”과 뼛국물 해장국, 곤달걀, 닭 목뼈 볶음은 서민들의 하루 노고를 달래주는 일품요리였다. 몇몇 냉면명가와 오향족발로 이름난 중국집이 있는 곳도 청계천 근방이었다.
개천이 복개된 뒤에도 나의 생활은 청계천과 밀착되어 있었다.
“빽판”으로 불린 복사음반을 구하러 골목골목을 뒤지고 다녔고, 헌책방의 종이향기도 내 발목을 잡았다. 카페를 열 때마다 나는 그곳에서 실내장식 자재와 소품들을 구했다. 유명 음악학원이 그곳에서 수없이 많은 연주인을 길러냈고, 밤의 성지(?) “팽고팽고” 나이트클럽 또한 그곳에 있었다.
박인환 시인은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라 했다.
세월은 가고 오고 사람도 세월 따라가고 오지만 추억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다.
꺼지지 않고 오늘도 청계천의 밤을 밝히는 저 불빛들처럼.
첫사랑 떠나보낸 사나이의 마음인가
오늘 밤은 청계천에 비가 내리네
비바람 몰아쳐도 두 주먹 불끈 쥐고
춘하추동 세월 가도 말없이 걸어 왔네
아~ 식어버린 찻잔 위에
내일을 그려 본다 청계천의 밤
그 무엇 찾으려고 나 여기 왜 왔던가
붉은 등 푸른 등에 청춘을 맡기며
남몰래 가슴 아픈 설움을 달래가며
수레바퀴 돌아가듯 끝없는 대화 속에
아~ 이 밤도 깊어 가면
내일을 기약하는 청계천의 밤
정태호가 본명인 남일해는 193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스물한 살인 1959년에 “비 내리는 부두”로 데뷔하여 남상규, 오기택과 함께 우리나라 저음가수의 삼두체제를 구축하며 60년대를 풍미했다. 64년에 발표한 “빨간 구두 아가씨”는 우리가요의 대표성을 지닐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에 미모의 영화배우 주란지를 반려자로 맞아들이는 데 성공한다.
“모녀 기타”와 “영광의 블루스”에 출연해 영화배우라는 이력도 남겼다. 연예인협회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굵직굵직한 상을 여럿 탔다. 묵직하며 흔들림 없는 그의 목소리처럼 잡음 한번 일으키지 않은 그의 인품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 각기우동 : 일본어의 '가케우동(掛け饂飩)'이 변한 말로 '가락국수'로 순화해서 쓰라고 권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