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로 보라, 자신을 바로 보라

2023.01.19 11:39:51

<산은 산, 물은 물> - 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들어가는 말: 이 글은 필자가 쓴 수필집 《어느 환경주의자의 생명사랑 이야기, 2003, 그물코 출판》에 실렸는데, 우리문화신문의 독자를 위하여 3회에 걸쳐 소개하려고 한다.

 

나의 전공 분야는 물, 그 가운데서도 수질 관리다. 물의 과학적인 측면은 내가 공부하는 분야지만 물의 철학적인 의미 또한 나의 관심사다. 그래서 노자⟪도덕경⟫제8장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또는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뜻을 찾아보기도 했고, 법(法)은 물 수(氵)변에 갈 거(去), 곧 물이 가는 것이 법이라는 해석 등을 연구해 본 적도 있다. 또한 우리나라 남부 해안 지방에는 물을 숭배하는 물 종교 신자가 상당수 있다는 것을 조사해 본 적도 있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 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물이라는 말이 나오면 보통 이상의 관심이 간다. 전공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신 성철 스님이 언젠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오랫동안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내가 교육받은 대로 형식 논리를 따라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 물은 물이란, 곧 ‘물=물’로서 아무것도 새로이 말해 주는 것이 없는 동의어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귀에는 틀림없이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이 한 구절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과학자답게 이 구절에 대한 탐구를 과학적으로 시작하였다.

 

2001년 4월경에 나는 인터넷 검색 엔진을 이용하여 유명한 절의 누리집에 접속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성철스님이 말씀하신 유명한 ‘산은 산 물은 물’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했는데, 설명을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몇 사람의 불자에게 물어보았지만 어려운 대답만 들었지, 쉽게 설명하는 대답을 구하지 못하고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학생들에게 설명은 그다음이고 우선, 제가 그 뜻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답변은 저의 전자우편 주소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심 합장.”

(그 당시 나의 인터넷 필명이 muusim 곧 무심이었다.)

 

모든 절에서는 누리집을 잘 관리하기 때문에 한 달 이내에 대부분 절에서 답장이 왔다. 그 가운데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

 

답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님께서 문의하신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내용을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철스님의 말씀으로 유명해진 글이긴 하지만 벌써 있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집착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집착으로 인해 보이는 시각이란 본마음에서 벗어나 보이게 된 것이랍니다. 그냥 긍정의 눈으로 본다면 산은 산이 됩니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을 더한 긍정이 된다면 어찌 그냥 긍정의 눈으로 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어요. 어떠한 사물을 볼 때 부정의 부정을 더한 긍정의 눈으로 본다면 비유가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글의 내용을 알음알이로 알려고 한다면 백 년이 가도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곧 수행을 통한 체험이 제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님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인연이 되어 훌륭하신 스승이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 보니 앞부분은 알겠는데, 뒤로 가서 부정의 부정을 더한 긍정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답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산천을 경계 삼아 공부하는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는 근본 이치를 물었을 때 나온 대답입니다. 근본을 묻는 말에 근본을 대답했으니 이 말에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무슨 말을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하더라도 우물 안 개구리 식이고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임을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산은 산’ 이 말에는 초기 불교의 향기보다는 선불교의 향기, 공(空) 사상의 향기, 노장사상의 향기. 신선 사상의 향기가 배어 있습니다. 그러니 답변이라기보다는 스님의 견해를 밝힙니다. 학생들에게 설명하거나 본인이 인식함에 근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중생이 보는 산천 또는 인생과 부처가 보는 산천은 다릅니다. 부처가 보는 산과 물은 진리 그대로의 산과 물이지만 우리 중생이 보는 산과 물은 진리가 그대로 살아있는 산천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세상의 진리가 무상하고 무아인데 우리는 그 진리를 체득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과 감정이 이입된 산과 물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즉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는데 자기 관점에 맞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삼법인이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진리가 그대로 살아있는 경지가 열반적정이라 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상”입니다. 큰스님께서 말한 ‘산은 산’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전도몽상에서 벗어나면 당신이 보는 그대로가 진리의 세상이며 ‘부처의 세상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윤리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승화시켜 본다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친구를 대하라. 위선을 버려라, 가면을 벗어라, 벽을 허물어라, 눈높이를 맞추어라,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세상을 바로 보라, 자신을 바로 보라” 등등의 가르침을 내포한다고 봅니다.

(앞부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뒷부분은 알 듯도 하다.)

 

답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안녕하십니까? 성철스님의 법문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지만 본래의 뜻은 알지 못하고 말에 그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불교는 본질을 보는 것이지 현상에 얽매이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진데 그것에 집착하여 부분을 전체라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본질을 보는, 그리고 아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을 보지 말라는 경봉 스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함경에 나오는 뗏목의 비유와 상통한다고 사료됩니다. 정진하십시오.

(변죽만 울릴 뿐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

 

답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이것은 성철스님의 선구입니다. 원래 선구라는 것은 범인이 간단히 해석하거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구라고 할 수 있죠. 뭐랄까 경지에 이르신 분이 후학들에게 화두를 던지고 그 화두의 해석이나 의미 찾기에 몰두하게 하는 그런 숨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학한 경지가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선구에 대해서는 해석하는 바가 조끔씩은 다르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선구에 대한 정확한 해석, 즉 정답은 없다는 거죠.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산이 물이 될 수 없고 물이 산이 될 수 없듯이 세상사 감추거나 포장한다고 해서 진리가 변할 수 없고 잠시 거짓에 현혹되거나 미혹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찰나의 현상일 뿐이지 절대 본질이 될 수 없다. 고로 산이 거기에 있고 물이 그렇게 흐르듯 삿된 포장이나 치장 없이 제 역할과 제 의미에 충실한 것이 바로 진리이며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이 해탈에의 지향인 것이다.

 

부족한 답이나마 만족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선구의 해석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화두를 던지시고 ‘이런 의미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또 말씀하셨다면 선구로서의 의미도 상실되어 지금쯤 이 말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뜻은 알겠는데, 정답이 없다기보다는 정답은 여러 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해 평소에 알고 지내는 거사(불교에서 남자 신도를 높여서 부르는 말) 한 분에게 번개글(이메일)을 보내니 다음과 같은 답이 왔다.

 

답: 산은 산, 물은 물

질의해 오신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하여 약간의 이해를 말씀드리죠. ‘산은 산, 물은 물이다.’라는 어구는 예전부터 흔히 인용하던 선구입니다. 우리는 적거나 많거나 간에 그 무엇을 가지고 인생을 걸어갑니다. 많이 가진 자는 행복해하지만 무거워하며, 적게 가진 자는 없음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많이 갖기는 어려운 것 없으나 아예 하나도 갖지 않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성은 갖고자 하는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 분별 망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적은 것 많은 것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경지라고나 할까요? 그 자리에서는 행ㆍ불행의 가치관도 갖지 않은 것이니 초월적인 세계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성인이나 범부의 개념도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무심의 경지라고 합니다. 더러움이 와도 흔적이 없으며 깨끗함이 와도 군더더기가 되는 마치 텅 비어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소위 무아의 경지입니다. 무아라면 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내가 없다는 것도 붙지 못하는 상태이니 열반의 세계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계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시므로 여여의 도리라고 합니다. ‘여여’란 그대로, 그대로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됩니다. 나는 나요, 너는 너다. 상대적인 것이 상호 침범하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 서로 돌고 나는 심오한 세계입니다. 분명히 텅 비어 신령함을 느끼게 될 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된다고 합니다. 관련하여 백운화상의 선시를 보면,

 

이 마음 이대로 도의 경지요

보이는 모든 것이 이대로 진리네

사물은 사물을 침범치 않아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옹화상의 선에 관한 법어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참선하여 해탈함이 대단한 것 아니니

즉시 한 생각을 돌이킴에 있다.

물 다하고 산 또한 끝난 곳에

물도 없고, 산도 없는 때에

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물을 물이다.’라는 것은 내가 물과 하나 되었을 때 느끼는 세계로 나라는 관념이 사라진 순수한 객관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 세계는 절대 객관이므로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비교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죠. 물 자체라고나 할까요. 그러한 물이라야 참된 물로 실상진리라고 보여집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듯 모를 듯 뚜렷하지 않다. 다만 내가 우연히 번개글(이메일) 아이디로 선택한 ‘무심’이 불교에서는 대단한 경지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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