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현정 스님께 합장한 뒤 절하고 모처럼의 만남을 반가워하였다. 인연이란 끈질긴 것인가 보다. 그러니까 8년 만에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속세의 나이로 보면 이제 스님도 많이 늙었으련만, 삭발한 스님들은 흰머리가 안 보이니 늙는지, 안 늙는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현정 스님은 오후에 마침 고등학교 동창생 몇 명이 여수에서 찾아왔는데, 우리와의 약속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절의 전화를 신도회장 집으로 돌려놓고서 안심하고 친구들과 지내다가 이제 돌아왔다고 미안해하신다. (주: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우리는 바쁜 것도 없는지라 평상에 앉아서 여러 가지 한담을 나누었다. 나는 평소에 느끼던 불교에 대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첫째, 불교의 경전에 문제가 있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나무아미타불,’ ‘수리수리마하수리,’ ‘아제아제바라아제’ 등이 무슨 뜻인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왜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는 불경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고 일상 불교 의식도 한글로 하지 않는가? 한자로 된 불경도 실제는 인도어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 아니고 음역한 것이라는데, 음역한 어려운 한자어의 뜻을 일반인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공부한 스님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불교가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종단 차원의 한글 역경 사업이 가장 시급한 사안이 아닌가?
둘째, 대부분의 불교신자는 1년에 3번 절에 간다고 한다. 곧 부처님 오신 날, 성도하신 날, 그리고 백중날(음력으로 칠월 보름). 개신교인은 일요일의 예배 참석이 신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다. 물론 천주교인도 일요일 미사에 참석해야만 한다. 불교에서는 그에 상응하여 새벽 예불이나 저녁예불, 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어떤 의식에 참석할 것을 불자의 의무로써 강조해야 할 것이 아닌가?
셋째, 개신교에서는 십일조(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치는 것)를 의무화하고 또 천주교에서도 교무금이라고 하여 매월 일정액을 헌금하도록 하고 있는데, 어째서 절에서는 시주를 의무화하지 않는가? 그것은 혹시라도 절의 입장료 수입이나 절 소유의 부동산 수입으로도 충분히 유지ㆍ관리된다는 안이한 경영 방침 때문이 아닌가?
현정 스님도 나의 지적에 대해서 공감하였고 그분 역시 한국 불교의 현실을 안타깝고 답답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현정 스님은 앞서가시는 분이었다. 스님은 금산정사에 오신 후에 모든 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사용하신단다.
세상이 진리에 따라 순탄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소수의 선각자는 항상 고민한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곧 ‘세상이 불완전하니까 내가 할 일이 많고 또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지 않은가? 만일 이 세상에 문제가 하나도 없다면, 그야말로 더욱 문제가 아닌가?’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할 일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살 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우리는 평상에 앉아서 서쪽 바다로 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았다. 섬에서 바라보는 일몰 광경은 아름다웠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수평선을 넘어가 버리니 주위가 성큼성큼 어두워져 갔다. 남해 섬의 조용한 산사에서 현정 스님처럼 사람 대신 나무와 대화하며, 컴퓨터와 텔레비전 대신 달과 별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스님 생활이 매우 좋아 보이고 부러워 보인다.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나의 과거는 무엇인가? 스님과 이야기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윤회라는 것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갑자기 나는 직장 동료이며 독실한 불교신자인 장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예전부터 나더러 전생에 수도승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에 장 교수가 그의 발언을 수정하였다. 내가 어느 날, 주변에서 이렇게 저렇게 만난 예쁜 여자들이 모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골치 아프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니까,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교수님은 전생에 파계승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도승이든 파계승이든, 어쨌든 나는 만일 전생이 존재한다면 중이었을 확률이 1/2은 넘는 것 같다.
어두워진 뒤 우리는 절로 내려와 저녁 공양을 하였다. 절 음식이야 나물 몇 가지가 전부이니 영양학적으로 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스님들을 보면 모두 혈색이 좋으니 영양과 건강하고는 크게 상관이 없는가 보다. 나는 사실 먹기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먹고 생선과 고기도 가리지 않는데, 베트남 사람처럼 말라 있지 않은가? 마침 절에는 대구에서 온 다른 방문객의 대가족이 있어서 우리는 그날 밤에 바닷가 마을에 있는 신도회장 집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나는 평소에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우리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 때문에 밤에는 대개 9시에서 10시 사이에 자고 새벽에는 4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난다. 이러한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내가 전생에 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일리가 있다. 어쨌든 그날은 연담 거사가 곤히 자고 있어서 나는 살며시 빠져나와 자동차로 갔다. 아직은 캄캄하였기 때문에 나는 자동차의 실내등을 켜놓고서 가지고 온 잡지를 읽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환경 잡지였는데, 마침 황소개구리에 관한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었다. 글쓴이는 장원 교수라고 나도 잘 아는 환경 운동가였다. 그 글의 내용은 도대체 황소개구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황소개구리 멸종 운동을 벌이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하여 미국에서 수입하여 퍼뜨려 놓고서는 인제 와서 생태계를 파괴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나도 황소개구리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때 어린 학생들은 물론 진짜 군대까지 동원하여 황소개구리를 잡아 패대기치고, 죽이는 잔인한 황소개구리 섬멸 작전을 텔레비전으로 보여 주었다고 한다.
환경 운동의 핵심은 무엇인가? 환경 운동은 한마디로 말해 생명운동 아닌가? 황소개구리의 생명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기를 수 있겠는가? 어느 절에서는 그 뒤 황소개구리를 위해 제를 지내고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사실 장원 교수의 지적은 옳았다. 황소개구리가 잠시 생태계를 교란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놔두면 생태계에서는 황소개구리의 천적이 나타나 황소개구리를 억제하는 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새 박사로 유명한 경희대의 윤무부 교수는 백로와 해오라기가 황소개구리의 천적이라고 말한다. 하천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황소개구리가 아니고, 배터리를 가지고 하천을 마구 지져 대 하천의 물고기 씨를 말리는 몰상식한 인간들이다.
글을 읽다 보니 의문이 일어났다. 황소개구리의 생명을 존중하자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유정(有情)이라고 하여 죽이지 말라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파리도 죽이지 말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뇌염을 옮기는 일본 모기는? 바퀴벌레는? 밥상에 오른 멸치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내 생각에는 불교학자들이 모여서 존중해야 할 생명의 범위를 정해야 할 것 같다. 생명의 범위를 너무 확대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생물학적으로는 벼도 생명체인데, 밥을 안 먹을 수야 없지 않은가? 내 소견으로는 불살생(不殺生)의 대상이 되는 생명체를 포유류로 한정하면 어떨지.
포유류는 사람처럼 장기(臟器)가 있고 따뜻한 피가 흐른다. 개나 소의 눈을 바라보면 그 녀석들도 무언가 생각이 있는 것 같고 감정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유정의 범위에 대하여, 요즘 유행하는 세미나나 워크숍이 필요할 것 같다.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와 소승불교가 있는 스리랑카의 스님까지 초청하여 국제 심포지엄이라도 한번 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