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을 설계한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 등록 2024.03.16 11: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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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학교 갑진년 2월 답사기 (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일자: 2024년 2월 16일(금)~17일(토)

답사지: 삼봉기념관, 남양 향교, 화성 당성, 융건릉, 수원 행궁, 수원 화성

참가자: 14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3월 8일

 

국토학교는 이원영 전 수원대 교수(그의 호를 따라 아래 병산으로 이름)가 주관하여 2023년 9월에 시작한 국토 답사 프로그램이다. 국토학교 회원들은 우리나라 국토에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를 월 1회 1박2일 일정으로 답사한다. 국토학교가 다른 답사 모임과 다른 점은 첫째 날 밤에 사회 각 분야의 유명 인사를 초빙하여 강연을 듣고 공부한다는 것이다. 국토학교 답사는 1년 동안 진행되는데, 회원이 아니더라도 중간마다의 답사에 준회원 자격으로 참가할 수가 있다.

 

2024년(갑진년) 2월의 답사 주제는 ‘삼봉 대감과 정조 임금의 발자취를 따라서’였다. 첫째 날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있는 삼봉기념관과, 화성시 남양면에 있는 향교와 화성 당성, 그리고 화성시 봉담면에 있는 융건릉을 방문한다. 답사지가 조금 많은 느낌이지만 모두 수도권에 있고 버스로 이동하기 때문에 무리한 일정은 아니다. 둘째 날에는 수원 행궁과 수원 화성을 답사한다.

 

국토학교 회원 14명은 2월 16일 아침 8시 10분 버스를 타고 양재역에서 출발하였다. 전용차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버스는 막히지 않고 잘 달렸다. 진위면에 있는 삼봉기념관에 9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삼봉(三峯)은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호다.

 

 

아침 10시 정각에 평택시 문화해설사가 나와서 우리를 삼봉교육관 건물로 안내하였다. 삼봉은 원래 경북 영주 출신이나 진위면에 기념관이 있다. 삼봉기념관의 정확한 이름은 ‘삼봉집 목판 기념관’이라고 한다. 교육관 입구에 비치된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 선생의 발자취>라는 유인물 내용을 참고하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삼봉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불교를 국교로 한 고려와 달리 조선 왕조가 성리학적 민본국가의 성격을 띠고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 삼봉이 있다. 그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건설한 일등공신이다.
 

 

삼봉은 1342년 영주에서 출생하여 19살에 성균시(城均試)에 합격하였다. 21살에 진사시 문과에 합격하고 이듬해 충주목 사록(司祿)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34살에 반원ㆍ친명 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에 의해 전라도 나주로 3년 동안 유배를 당하였다. 39살에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三峯齊)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삼봉재에서는 북한산의 봉우리 3개가 보인다고 해서 삼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42살에 함경도 함주로 가서 이성계를 만나 정치, 사회 등의 개혁을 결의하였다. 43살에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46살에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부임하였다. 47살 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뒤 정권을 장악하였다. 48살에 이성계, 정몽주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50살에 과전법(科田法)을 주도한 이유로 구세력의 저항을 받아 봉화로 유배되었다.

 

51살인 1392년(공양왕 4, 태조 1)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구세력에 의해 다시 예천의 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반대 세력이 제거되자, 조준 등 53명과 함께 7월 17일 조선 왕조를 개국하였다.

 

53세(태조 3)에 조선 왕조 헌법에 해당하는 《조선경국전》을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조선경국전은 뒷날 《경국대전》이 성립되는 모체가 되었다. 54살에 인왕산, 백악산 등 사산(四山)을 실측하여 도성의 범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 건축을 주도하여 완성하였다. 경복궁의 이름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등의 궁전 이름을 지었다. 태조는 삼봉 선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유학에도 으뜸이요 공적도 으뜸”이라는 뜻으로 유종공종(儒宗功宗)의 친필을 하사하였다.
 

 

55살에 도성의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문)과 사소문(四小門)의 이름을 짓고 한성부의 5부와 52방(坊, 동네를 말함)의 이름도 지었다. 지금도 사용하는 안국동, 가회동 등의 동네 이름은 삼봉이 지었다.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군사 편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을 독려하고,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수군을 훈련시켰다. 56살에 요동 출병을 시도하였으나 온건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57살(태조 7)에 <불씨잡변(佛氏雜辨)> 19편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 입국의 정당성을 이론화하였다. 군사 훈련을 강화하여 요동 정벌을 준비하였다. 민본(民本)정치를 추진하면서 이방원과 이방번을 전방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26일 새벽,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고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방원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문과와 무과를 모두 합격한 수재였다. 처음에 삼봉과 이방원은 절친한 관계였으나 세자 책봉과 사병 혁파 그리고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이 가신들을 동원하여 삼봉을 기습 참살하였다.

 

삼봉은 아들 셋을 두었다. 큰아들 진(津)은 당시 태조를 수행하여 함흥에 있어서 화를 면했으나 나머지 두 아들은 삼봉과 함께 화를 당하였다. 이방원은 삼봉의 시신을 없애고, 삼봉과 관련된 어떤 추모나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삼봉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고, 현재 삼봉기념관 옆에 있는 언덕에는 삼봉의 위패를 모신 빈뫼(가묘)가 있을 뿐이다.

 

《삼봉집(三峯集)》은 정도전의 시가와 산문, 철학, 제도 개혁안 등을 모아 간행한 문집이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아들에 의해서 2권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그 뒤 1465년(세조 11)에 그의 증손에 의해 6책으로 중간되고 다시 1486년(성종 17) 8책으로 증보되었다. 그 뒤 1791년(정조 15), 삼봉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기존의 삼봉집에 빠진 글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문집을 다시 펴내도록 규장각에 명하여 경상도 감영에서 14권 7책으로 만들었다. 이때 제작한 삼봉집의 목판이 현재 삼봉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1870년(고종 7) 고종은 경복궁 중건을 계기로 한양 도읍 건설을 주도한 삼봉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1872년(고종 9) 고종은 삼봉의 업적을 남기려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경기도 양성현 산하리에 문헌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912년 산하리에 있던 문헌사를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은산리)로 이전하였다.

 

 

삼봉의 개혁 사상의 근본정신은 삼봉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의 하늘이다.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값어치가 있다.”

 

정도전은 군주가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백성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재상중심 체제를 지향하였다. 정도전은 신권(臣權)을 강화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민본 정치의 기틀을 닦았다.

 

삼봉은 고려의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 시험을 통하여 뽑게 하였다. 양반과 천민 사이의 중간 계층인 양인(良人) 계급에서도 관리를 충원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 것이다.

 

삼봉은 언로를 개방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 등 간관(諫官: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를 아울러 말함)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사간원은 상소를 올려서 임금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부패한 관리를 고발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관청이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감찰과 탄핵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써 공정하고 투명한 국정 운영을 추구하였다.

 

세계사를 통틀어 그 시대에 임금의 전제를 막기 위하여 간관을 두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조선 시대 사극에서 보듯이 신하들이 어전에서 “전하, 아니 되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간관 제도 덕분이다. 절대 권력자인 임금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간관에 대한 보호 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어서 임금이 어지간히 작심하지 않으면 간관을 유배 보내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계속)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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