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수목원 일군, 파란 눈의 한국인 민병갈

2024.03.25 11:54:11

《민병갈,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 정영애 글, 보물창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히는 천리포수목원은 계절마다 풍경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충청남도 태안에 있는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이 바로 천리포다. 놀랍게도 이 천리포수목원을 가꾸어 낸 이는 우리나라 귀화 1호 미국인, 민병갈이다.

 

이 책 《민병갈,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의 지은이 정영애는 우연히 천리포수목원을 갔다가 민병갈 원장의 삶에 매료되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머릿속에 천리포수목원과 민병갈 원장이 떠나질 않아 결국 수목원에 전화를 걸었다. 민병갈 원장님의 전기를 쓰고 싶다고 하자 천리포수목원에서도 흔쾌히 허락해 주면서 여러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이렇게 천리포수목원과 그곳을 가꾼 한 사람에게 반한 지은이의 열정이 빚어낸 책이다.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천리포수목원으로 차를 몰았다. 모두 다섯 번을 찾아갔고, 그때마다 민병갈 원장이 반겨주는 듯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그럼 머나먼 한국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수목원을 가꿔낸 주인공, 민병갈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고 어떻게 천리포수목원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민병갈 원장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결국 무의식적인 이끌림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이 든다.

 

칼 밀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작은 도시 피츠톤에서 삼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밀러의 아버지는 밀러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밀러의 유년 시절은 무척 가난했지만, 밀러는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당시 손꼽히는 회사로 인정받던 코닥에 합격했다.

 

그러나 밀러는 그 회사에 가지 않았다. 해군정보학교에서 공부하고 전쟁에 참전해 모험을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왜 좋은 회사에 가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냐며 말렸지만 밀러는 결국 미국 해군 동양어학교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우고, 태평양전쟁 전선으로 떠났다. 그 무렵 우연히 해군정보학교 교장 베른이 보여준 한국 사진 몇 장을 보게 됐다. 한국 아이들, 한국인이 사는 초가집, 기와집, 경복궁 사진들이었다. 이상하게 사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밀러는 줄곧 한국을 생각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며 오키나와에 있던 밀러는 일본 본토로 파견근무를 가야 했지만, 그는 오히려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왜 굳이 위험한 한국에 가려 하냐는 사령부의 만류에도 밀러는 한국행을 택했다. 이것이 한국과 이어진 아주 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p.21)

동이 틀 무렵, 함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미군들은 곧장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은 조용하고 포근했다. 흡사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나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저 정답기만 했다.

 

한국에 온 밀러는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곳곳을 다녔고 한옥에 살았다. ‘나는 전생에 한국인이었나 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한국이 좋았다. 한국에 오래 남기 위해 밀러는 군정청 공무원이 되었다가, 마침내 원하던 한국은행에 들어갔다. 한국은행은 한국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직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밀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다시 한국으로 갈 기회만 찾았다.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법. 한국은행에서 밀러에게 고문직을 제안하면서 그는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밀러는 한국이 정말 좋았다.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을 모아 주말마다 한국 곳곳을 안내했다. 훌륭한 여행 안내자가 되기 위해 방방곡곡을 다니며 메모한 것들을 정리하고 사진을 찍고, 모자라는 부분은 한국의 향토사까지 수집하며 공부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도 쌓였다. 오랜 시간 공부하며 투자하던 주식이 성공하면서 빠르게 부자가 되었다. 어릴 때 가난했던 생활을 잊지 않은 그는 평소엔 근검절약하면서도 한국을 알아가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1961년 여름부터 밀러는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가까운 천리포까지 산책했다. 1962년 여름에도 어김없이 천리포로 휴가를 간 그는 산책길에 한 농부의 애원 섞인 청을 받게 된다. 딸을 결혼시킬 돈이 없으니 제발 천리포에 땅을 사 달라는 것이었다. 농부가 말한 땅값은 밀러의 한 달 치 봉급도 되지 않았다. 밀러는 이렇게 처음으로 천리포에 땅 6,000평을 샀다. 그 뒤로 돈이 필요한 농부들이 밀러를 찾아와 자기 땅도 사 달라고 졸랐고, 밀러는 농부들을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그럴 때마다 땅을 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산과 나무, 식물을 좋아하던 밀러는 어느 날 세계 여러 나라에 설립된 수목원에 관한 책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던 그는 멈칫했다. 북한 평양에 수목원이 있었던 것이다. 평양에도 있는 수목원이 남한에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 그는 수목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천리포가 떠올랐다. 천리포에 수목원을 만드는 것! 자신의 소명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밀러의 갖은 노력이 시작되었다. 천리포에 수목원을 조성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나무를 사서 심어도 금방 죽어버렸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가 필요했다. 밀러는 연희동 집에 온실을 차려 연구하며 천리포수목원에 온 정성을 쏟았다.

 

한편 밀러는 한국인으로 귀화하며 호적상으로도 한국인이 되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첫 미국인이었다. 이전부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지만, 귀화는 쉽지 않은 문제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귀화하는 순간부터 서로 남남이 된다고 생각했고, 삼 년 동안 아들을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며,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설득도 밀러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순 없었다.

 

(p.90)

밀러는 하루빨리 한국의 성과 이름을 갖고 싶었다. 그는 우선 ‘성(姓)’부터 결정하기로 했다. 한국의 많은 성씨 가운데서도 밀러는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 온 한국은행 총재 ‘민병도’와 같은 성인 ‘민’ 씨가 되고 싶었다. ‘민’은 ‘밀러’와 발음이 비슷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름도 ‘병도’에서 따오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 첫 자는 ‘병도’의 돌림자를 따라 ‘병’으로, 끝 자는 ‘갈’로 결정했다. 끝 자인 ‘갈’은 밀러의 미국 이름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에서 딴 것이었다.

 

놀랍게도 민병갈은 여흥 민 씨 족보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민병도를 따라 여흥 민 씨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싶었던 그의 간청에 종친회가 열렀고, 마침내 반대 한마디 없이 족보에 올라갈 수 있었다. 58살의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칼 밀러가 한국인 민병갈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에게도 병마가 찾아왔다. 직장암 말기로 투병하던 그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병마가 깊었지만, 모든 것이 자신이 좋아선 한 일이고,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p.110)

지나간 일들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 본 한국 땅, 정말 멋있었어. 1945년 9월 8일, 먼동이 틀 무렵이었지. 탐사 여행! 즐거웠어. 힘들게 수목원을 만들던 그때가 정말 행복했어. 완도호랑가시를 발견할 때도 행복했고……. 모두모두 아름다운 추억이야. 완도호랑가시 때문에 400여 종의 변종이 나왔지. 정말 대단했어. 라즈베리 펀은 또 어떻고. 아름다운 나의 꽃…….’

 

민병갈은 2002년, 자신이 평생을 바쳐 가꾼 천리포수목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002년 4월 12일, 민병갈을 태운 꽃상여가 천리포수목원을 한 바퀴 돌았다. 민병갈의 친구이자 스승인 이창복 교수와 오랜 친구들, 이웃사촌들, 수목원 직원들, 그리고 평상 집안일을 돌봐준 박순덕 아주머니가 상여 뒤를 따랐다.

 

그의 주검은 수목장으로 천리포수목원에 묻혀 있다. 수목원 직원들이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한지로 만든 상자에 넣어 ‘리틀 잼’이라는 목련나무 아래 묻었다. 죽어서도 천리포수목원에서 한국의 산천을 바라보는 그는 참으로 행복하지 않을까.

 

한국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던 파란 눈의 한국인, 민병갈. 그의 헌신으로 활짝 피어난 천리포수목원을 보면 한 사람의 애정과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을 보여줄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올해 봄, 천리포수목원으로 훌쩍 떠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일구어낸 숲길을 거닐어 보는 것도 좋겠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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