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한 명의 선비가 공손하게 서 있습니다. 형형한 눈빛과 당당한 표정이 시선을 끕니다. 머리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소 집안에서 즐겨 쓴 동파관을 썼습니다. 조선의 선비를 머릿속에 그릴 때마다 이 초상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문학과 예술을 즐긴 선비, 서직수
무엇보다 눈이 인상적입니다. 눈의 윤곽에 고동색 선을 덧그려 그윽한 깊이감을 주었으며 눈동자 주위에는 주황색을 넣어 눈빛이 생생합니다. 입고 있는 크림색 도포가 풍성합니다. 소매의 통은 아주 넓고 길이는 손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깁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의 도포일수록 이처럼 넉넉한 품세를 갖췄습니다. 동정 없이 폭이 넓은 목의 깃, 얌전하게 묶은 가슴의 세조대, 부드러우면서도 형체감을 잘 드러내는 옷의 윤곽선과 주름들,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체 옷 길이, 이 모든 것들이 선비의 점잖은 풍모와 잘 어울립니다.
도포 자락 아래로 하얀 버선발을 드러낸 채 고운 돗자리 위에 올라서 있습니다. 눈길이 비켜가기 쉬운 발, 그 하얀 색채가 눈부십니다. 조선의 초상화 가운데 이처럼 신발을 벗고 있는 예는 드뭅니다. 인물이 내뿜는 기백이 화면의 주조를 형성하는 가운데 동파관과 세조대가 이루는 검정의 조응, 하얀 버선발의 파격이 단조로움을 깨뜨립니다. 돗자리의 횡선들은 화면의 이런 기운을 떠받들면서 평정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 서직수(1735~1811)는 누구일까요? 그의 자(字)는 경지(敬之)로 1765년(영조41) 진사시에 합격한 뒤 능참봉(陵參奉)을 시작으로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都正)을 지낸 인물입니다. 이 작품은 1796년 서직수의 나이 62살 되던 해에 당시 으뜸 궁중화원들인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려서 합작한 것입니다. 정조 어진(御眞)을 그릴 때 참여했던 두 화가가 함께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초상화의 수준을 짐작게 합니다.
오른쪽 윗부분에는 서직수가 이 초상화를 보고 스스로 평한 글이 있는데 고친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초상화가 비공식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초상화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기에 소개해 봅니다.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이름난 화가들이지만 한 조각 내 마음은 그려내지 못하였다. 안타깝도다. 내가 산속에 묻혀 학문을 닦아야 했는데 명산을 돌아다니고 잡글을 짓느라 마음과 힘을 낭비했구나. 내 평생을 돌아보매 속되게 살지 않은 것만은 귀하다고 하겠다” (李命基畫面, 金弘道畫體. 兩人名於畫者, 而不能畫一片靈臺. 惜乎. 何不修道於林下, 浪費心力於名山雜記. 槪論其平生, 不俗也貴).
초상화는 과연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까?
이처럼 초상화는 옛사람들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진이자 그들의 사고방식을 간접적으로 느껴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임금의 초상인 어진이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면,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의 초상인 ‘공신상’, 원로 고관들의 초상인 ‘기로상’은 그 가문과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은 대부분 오사모를 쓰고 정장관복을 차려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엄중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공적인 초상화들은 당대 으뜸 화원들이 이루어 낸 예술품인 동시에 충(忠)을 표상하며 나라 경영에 필요한 정치적 장치가 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본복 초상과 달리 서직수 초상화는 야복본(野服本) 초상으로 분류됩니다. 야복 초상화는 ‘연거복초상화’라고도 하는데, 인물은 평상복 차림으로 주로 복건이나 동파관, 정자관을 쓰고 심의나 도포를 입고 있습니다. 야복이라는 말에는 원래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들의 복장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러한 야복 초상화는 성리학자들의 검박한 미감이나 단아한 모습을 담기에 적절하여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산림학자들이 좋아했습니다. 조선사회에 유교적 가치관이 정착하면서 이러한 차림은 더욱 유행하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관직에 몸담은 관리들 역시 즐겨 야복 초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서직수는 자신의 초상화를 자평하며, 자신의 마음은 그려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초상이 마음을 그려낼 수 있다는 가능성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이래 조선의 선비들은 초상화 속 모습이 닮았는지 닮지 않았는지를 논하는 단계를 넘어서 자신의 내적 세계와 지향점까지 초상화 속에 표현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 가운데는 초상이 모습만을 전할 수 있을 뿐 정신은 표현할 수 없다는 강한 회의를 두고 초상화 제작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송시열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유학자 윤증은 자신의 초상화 제작을 반대하였으며 이에 제자들이 화가에게 도포를 입혀 선비로 위장시킨 채 잠입시켜 초상화를 그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문인 남유용은 군자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에 모습이 전해지는 것은 하찮은 일이라 하여 초상화가 박선행이 초상화를 그려 주겠다는 것도 사양하였습니다. ‘터럭 하나라고 같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던 조선의 선비들이 초상화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우선 초상화의 사실성이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사실성을 넘어 ‘초상이 정신을 담을 수 있다’라고 까지 초상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초상화를 실제 인물처럼 그려낼 수 있는 화법의 발전과 기량이 성숙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초상화에 숨겨진 비밀
놀랄만한 초상화의 사생력을 서직수 초상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 쓴 동파관에 음영을 묘사하여 마치 입체물을 보는 듯합니다. 얼굴의 굴곡과 얼굴빛은 짧고 부드러운, 무수하게 많은 필획으로 그려냈습니다. 각각의 붓질이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 녹아 서직수의 얼굴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얼굴의 점, 검버섯, 주름 등 세부적인 피부의 특징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당대 으뜸 초상화가 이명기가 그린 서직수의 얼굴은 1796년 당시 조선의 초상화 실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김홍도가 그린 복식은 어떠할까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서직수 초상화를 조사하며 X선 투과 촬영을 하였습니다. X선은 가시광선에 비하여 파장이 짧아서 X선 투과 촬영을 하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몸체에 거친 붓질이 많이 보입니다. 도포의 앞면에서는 이런 붓질을 볼 수 없는데, 이것이 무엇일까요? 촬영 사진에 보이는 도포의 붓질은 앞면의 모습이 아니라 화면의 뒷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X선으로 촬영했기 때문에 뒷면의 붓질까지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화면의 뒤에서 채색하는 것을 ‘배채법(背彩法)’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비단 올 사이로 채색이 비춰 보이며 은은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배채법으로 뒤에서 얼굴과 복식의 기본적인 색채를 내고 앞에서는 가볍고 맑게 담채 위주로 세부적인 묘사를 하여 인물의 모습이 단아해 보입니다. 사진에 보이듯 하얀 색으로 도포의 뒤를 한번 칠하였기 때문에 앞에서 보면 배채가 없는 바탕 화면과 달리 인물 부분은 배채를 전제한 깊이감 있는 색감이 보이는 것입니다.
서직수 초상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2차원적 화면에 그려 넣은 예술혼이, 초상화를 단지 그림 조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신뢰한 옛사람들의 경건함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정성과 믿음이 조선시대 초상화를 이토록 품격 있게 만든 것이겠지요.
국립중앙박물관(이수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