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와 가야금은 한국의 대표적인 현악기

  • 등록 2024.07.30 11: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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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90]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중국에 금(琴)과 슬(瑟)이 있다면, 한국에는 고구려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거문고와 가야국으로부터 연주되어 온 가야금이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부부(夫婦)지간의 정이 돈독할 때 ‘금슬상화(琴瑟相和)’라는 말을 한다. ‘금실이 좋다.’ 또는 ‘금실 좋은 부부’라는 말은, 금이라는 악기와 슬이라는 악기의 어울림이 그만큼 조화롭다는 뜻이다. 거문고와 가야금의 조화를 뜻하는 말로도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규방(閨房) 여인들의 손끝에서 가야금의 가락들이 이어져 왔다면, 거문고의 주된 향수층은 남성들이었고, 남성 가운데서도 사대부들이나 선비 층이 중심이었다. 예로부터 선비란, 좌서우금(左書右琴)이라고 해서 책과 금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했다. 곧 왼손에는 책, 오른손에는 금을 든다는 말이니, 곧 선비는 책으로 지식을 얻고, 거문고로 마음을 닦는다는 말이 되겠다.

 

그래서일까?

 

거문고만큼 상류사회, 또는 지식인 사회에서 애호를 받아 온 악기도 드물다. 17세기 초, 양덕수(梁德壽)가 펴낸 《양금신보(梁琴新譜)》에는 거문고가 음악을 통솔하는 악기라는 점, 그래서 군자의 악기인 거문고를 백악지장(百樂之長)으로 보고 있다. 거문고나 가야금의 발음(發音)은 관악기처럼 그 소리가 계속 울리는 것이 아니라, 여음(餘音)이 있어서 이를 즐기는, 즉 소리의 빈자리를 채워주려는 마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악보(古樂譜)의 대부분이 거문고 악보인 점을 보더라도 글을 아는 선비들이 악곡을 익히고, 그 악곡이나 연주법을 기억하기 위해, 또는 후대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악보화 할 수 있었던 능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외양을 보면, 거문고와 가야금은 그 크기나 생김새가 비슷해서 구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가야금 12줄’을 기억한다면, 거문고와의 구별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가야금 12줄 모두는 안족(雁足)이라고 부르는, 곧 기러기발처럼 생긴 바침 위에 얹혀져 있지만, 거문고는 6줄이며, 그 가운데서 제1현, 제5현, 제6현 등 세 줄이 안족 위에 얹혀 있고, 나머지 제2, 제3, 제4현 등 세 줄은 16개의 괘 위에 받혀져 있어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거문고의 6현 가운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줄은 제2현과 제3현, 곧 유현(遊絃)과 대현(大絃)이다. 유현은 맑고 밝은 음색을 지녔지만, 대현은 상대적으로 굵은 줄이어서 낮고 어두운 편이다. 거문고가 그러하듯 가야금의 음역은 윗부분이 높은음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이 두 악기는 전체적으로 생김새가 비슷하나, 그 연주법이나 소리를 내는 방법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가야금은 손가락으로 뜯거나 튕기는 주법이 중심이고, 거문고는 술대로 줄을 내리치거나 올려 뜯으며 소리를 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가야금은 가야국의 악기로 우륵(于勒)이 잘 탔는데, 가야가 망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슴에 품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진흥왕이 우륵을 받아들이고, 그의 음악을 듣고는 감탄하여 신라의 젊은 청년 3인, 곧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에게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는 노래, 그리고 만덕에겐 춤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이들 3인이 선생의 음악을 거의 다 배워 갈 무렵, 진흥왕은 좌우에 늘어선 신하들과 함께 가야금 음악을 감상한 뒤, 매우 흡족해하며 이 음악을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진흥왕의 이러한 의지와는 달리, 신하들은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주된 까닭은 가야금은 ‘망한 나라의 악기며 음악인데, 융성 일로에 있는 신라에서 어찌 이 음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는 당치 않다’라는 주장이었다. 이때 진흥왕이 신하들을 이렇게 설득하였다다. ‘<악하죄호(樂何罪呼)?-가야왕(伽倻王)음란자멸(淫亂自滅)>’ 곧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다고 하는가! 가야의 임금이 정치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서 스스로 망한 것이지, 가야금이 있어 가야가 망했단 말인가!”

 

1,500여 년 전의 사건이지만, 진흥왕의 식견이나 판단력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만일 그때, 우륵과 진흥왕의 만남이 없었던들, 가야금이 우리 겨레의 악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야금과 거문고, 또는 향비파와 같은 현악기들을 전해 준 선인들의 혜안(慧眼)이 고맙기만 한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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