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국민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 속의 호랑이나 용이나 토끼나 닭이나 꿩이나 거북이가 다 우리들과 같이 춤출 수 있는 친구들로 그린 그림이다. 필요할 때는 비도 오게 하고 귀신도 쫓아주고 복도 갖다 주는 영물들이다. 그 속의 나무나 바위나 물이나 구름까지도 다 신령이 깃든 대상들이다."
조자용(趙子庸, 1926~2000) 선생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민화를 전시할 때 우리 민화는 이렇게 설명되었다. 민화를 처음 만난 관람객들은 민화 속에서 동물들이 어덯게 서로 대화하고 함께 노는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조자용은 1967년 한 골동품상에서 까치 호랑이 민화를 만났다. 호랑이 머리에서 까치가 세상 소식을 전하며 대화하는 그림이다. 그 그림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고 우리나라 호랑이의 운명을 바꾸었다. 민화 속 호랑이는 88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가 되어 올림픽을 주최한 한국인들이 해학과 익살을 좋아하는 좋은 사람들이란 사실을 대변해 주었다.
'민화', 곧 일반 민중들이 좋아하고 키워온 그림이란 뜻의 말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처음 쓸 때는 한국인들의 예술에는 비애(悲哀), 곧 슬픔이 깔려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했지만, 조자용은 이 민화란 말을 다시 제창하면서 우리 민족이 해학을 좋아하는 긍정적인 사람들이란 인식을 세상에 널리 알려주었다. 그는 첫 민화 박물관인 에밀레 박물관을 만들어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민화를 수집하였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박물관의 민화들을 외국에 나가서 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민화를 아끼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가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21세기에 부활하였다.

요즘 전 세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하는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호랑이와 까치를 불러왔다. 이 영화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구하는 케이팝 스타들의 이야기다. 세상에는 인간의 형태를 한 채 혼을 노리는 악귀들이 존재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세 여성 헌터가 대대로 노래의 힘으로 혼문(魂門)을 만들어 악귀들을 물리쳐 왔고, 오늘날 그 임무는 5년 차 최정상 걸그룹 헌트릭스로 이어진다는 설정이다. 무대 위에 선 헌트릭스는 세상의 구원자이자 아이돌이다. 그들의 노래는 세상의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이 영화에서 신스틸러로 등장하는 캐릭터 ‘더피’가 바로 한국민화에 나오는 호랑이다. 여기에 갓을 쓴 까치 '서 씨'도 등장한다. 극 가운데 더피 호랑이는 까치 ‘서씨’와 함께 보이그룹 '사자보이즈'의 리더 진우와 걸그룹 ‘헌트릭스’의 멤버 루미 사이를 오가는 전령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두 동물의 외형은 귀여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고 이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한껏 흥겹게 만들어준다.
넷플릭스가 발표한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지난달 20일 공개 이후 91일 동안 8,000만 뷰를 기록함으로써 지금까지 넷플릭스가 제작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이 영화에서 부른 OST 8곡은 빌보드 핫100에 동시 진입했다. 극중 사자보이즈가 부른 ‘유어 아이돌’은 스포티파이 데일리 톱 송 미국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버라이어티(Variety)」는 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2025 오스카 애니메이션 장편 부문 후보에 들어야 할 값어치 있는 경쟁작”으로 꼽기도 했다.
영화를 만든 주역은 일찌기 5살에 캐나다에 이민간 한국계 여성이다. 이 여성은 소녀시절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서 사촌들과 함께 한국의 텔레비전 속 이야기들과 음악들을 보고 듣고 자랐다.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가지고 캐릭터 디자인과 그림에 빠져들어 애니메이션 학교를 택했고 졸업작품이 드림웍스의 눈에 띄어 애니메이터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바로 이 작품의 감독인 매기 강(Maggie Kang)이 그 주인공이다. 자기가 좋아하던 한국문화와 K-POP 아이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옛날이야기 속에 남아 있던 인물과 동물들을 다시 현대식 영상과 음향과 노래와 이야기로 살려낸 한국계 여성의 감수성이 세계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비단 호랑이와 까치만이 아니다. 악귀 디자인을 보라. 저승사자나 도깨비, 물귀신은 나라 밖에선 나올 수 없는 이미지다. 여성들은 섹시하고 거칠며, 멋있는 여자 영웅이다. ‘헌트릭스’ 멤버들의 모든 옷과 모든 장면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영어로 대사를 하지만, 한국어 입 모양처럼 작업했고, 리액션도 모두 한국 스타일로 바꿨다.
강 감독은 이런 대부분이 어린 시절 경험들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감독이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에서 보고 싶었던 음식들. 한국의 모든 것을 담았는데 특히 음식은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기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웠지만 이것을 재현하기 위해 10명 정도 팀원을 데리고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명동 거리의 벽돌이나 길 디자인, 북촌 골목의 경사도 같은 디테일들이 마치 실사한 것처럼 되살아났다. 수저 밑에 냅킨을 까는 장면도 그렇게 해서 추가됐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영화의 주인공과 더불어 호랑이(더피)와 까치(서씨) 문화상품(굿즈)이 주목을 받고 높은 인기를 얻어 팔려나가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즐거운 부산물이라 할 것이다. 호랑이 더피(Duffy) 문화상품은 넷플릭스조차 예상하지 못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호랑이-까치 문화상품이 생각지 못하게 동이 났다고 한다.

매기 강 감독은 어느 언론 회견에서 말한다.
“한국인이지만, 북미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양쪽 세계에 다 발을 딛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두 세계를 화합시켜야 했다. 영어로 한국문화를 알리는 방식이 내게 맞는 방식이라고 봤다. 영어로 한국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미국 회사에 의해서 한국적 문화를 가진 작품이 제작된다는 사실은 한국 문화가 가진 강력한 힘을 나타내주는 증거며, 한국 문화가 얼마나 많이 발전해 왔는지, 한국이 문화적으로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굉장히 자부심을 느낀다.” .......매일경제 Citylife 제989호(25.07.22)
1960년대 한국의 조자용이 외롭게 모아서 알린 우리 민화 속의 호랑이나 까치, 혹은 다른 동물들의 해학과 세계는 20년 뒤에 서울 올림픽을 통해, 그리고 다시 40년 뒤에 캐나다에서 자란 한국 소녀와 미국 회사들에 의해 이 세상에 다채롭고 생생하게 부활했다. 그들은 그림 속에 갇힌 동물들이 아니라 세상을 돌며 활개치고 다니는 살아있는 캐릭터로 부활한 것이다.
영화를 본 김석순 중앙대 교수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을 가지고 이 시대에 활용하려는 사람은 전통을 '가진 것'이라기보다, '작동시키는 것'으로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우리 전통을 보존해야 하는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계를 설득하는 방법으로 활용할 때 전통이 비로소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서울문화투데이. 20205년7월16일)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백남준 죽음 이후 우리들이 다시 살리려는 창조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거기에 컴플렉스를 떨쳐낼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전통은 이미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이미지와 기호로서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 그 잠재력을 신뢰하고, 상상하고, 표현해야 한다. 요즘 전 세계에 파져 가고 있는 K-컬쳐가 바로 그 증거이지만 더 넓고 깊게 파고 들어갈 여지도 충분하고 그럴 필요가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런 깨달음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다.
사족) 그런데 마침 7월 29일은 멸종위기에 처한 호랑이를 보전하고 서식지 보호를 위해 지정된 ‘국제 호랑이의 날’이란다.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사라진 지 꽤 오래되었지만, 호랑이 탐색연구가인 임순남 씨는 태백산맥 깊은 곳에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다고 믿고 추적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 호랑이의 생존 여부를 떠나서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전설 속에, 민화 속에 있던 호랑이는 이렇게 부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