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이 장수 비결임을 알려준 심소 선생

  • 등록 2024.08.27 11: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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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94]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금 우리음악이야기는 궁중(宮中) 악무(樂舞)의 대가였던 심소(心韶) 김천흥(1909-2007) 명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선생은 1922년 14살 때, 5년 과정이었던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정규과정을 밟고 졸업하면서 악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규일(河圭一)에게 정가(正歌), 한성준(韓成俊)에게 민속무를 배웠으며, 1955년도에는 <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면서 ‘처용랑(處容郞)’,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심소 선생에게 악기나 춤을 배운 제자들은 선생은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였고, 유머가 풍부하였으며 항상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게 사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일부 글쓴이와의 대화를 소개하였거니와 심소 선생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졸업한 뒤, 곧바로 아악부에 취직을 했고 그로부터 정규직, 임시직을 가리지 않고 국록(國祿)을 받고 살아왔다는 자부심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으로 받아왔다는 자체가 망극하다는 표현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닐진대, 진정 국가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가에 대한 봉사로 당연히 받는 대가이며, 그것이 양에 차지 않아 늘 불평불만에 차 있는 주위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국가에 대한 선생의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이 진하게 기억하게 된다.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참 애국자의 마음 자세를 지닌 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국 근현대 예술사》 증언채록 작업을 하면서 글쓴이가 선생과 나눈 대화 중, 인상적인 대목을 조금 더 소개해 보기로 한다.

 

-선생님은 해금을 전공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저희가 알고 있기로 해금의 근대 음악인들 중에는 이름을 낸 이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응, 선생님들이 2년 동안의 실력, 즉 재능을 보아서 누구 거문고 해라, 가야금 해라, 해금, 대금, 피리해라, 그렇게 나눕니다. 그러는데, 주로 중심이 피리나, 대금에 다 치중허신다. 이 말이예요. 지금은 해금이 많이 알려져있지만, 그때는 해금을 치지 않았거든요. 뭐 해금 독주를 시키기를 해? 합주 속에 끼어서 하게 되니까. (아래 줄임)

 

- 선생님한테 대단히 죄송한 말씀인데, 예전에는 해금을 그렇게 중요한 악기로 여기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 말이 사실인가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시원찮은 사람을 뽑죠. <웃음> 그랬는지도 몰라요. 내가 뭐 특출 나게 무슨 헛짓을 허고, 뭐 그랬느냐 허면, 나 그렇지 않았어요. 인제 장인식이 나이도 많고, 박성재는 머리가 좋아 1, 2등 하려고 경쟁했지만, 우린 그런 의식은 없었어. <가운데 줄임> 거문고, 가야금, 그다음이 해금이었는지도 몰라요.

 

- 피리나 대금 같은 악기들은 합주에서 주요 선율을 끌고 나가야되니까, 그런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뽑고, 그 외 해금과 같은 악기들은 좀 처지는 사람들을 뽑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이를 확인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불쾌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참고로 1950년대 후반, 국립국악원 신국악 창작의 개척자였던 김기수 선생 같은 분은 해금을 매우 주요 악기로 내세워 공부 잘하고 음악적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 해금을 전공하도록 권유하였던 점을 기억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궁정악사들에게 해금의 역할은 지금과 같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본인이 전공해 온 악기를 남들이 주요 악기가 아니라고 평가절하하는 그 자체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심소 김천흥의 경우에는 중요한 악기가 아니기 때문에 나같이 시원찮은 사람을 뽑았다는 말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얼핏 들으면, 자존심도 없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을 바닥까지 낮추는 모습이 오히려 존경을 자아내게 한다.

 

나는 지금도 심소 선생이 국가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씀이나 자신을 스스로 내세우지 않았던 모습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선생의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배우고, 생활 속에서 실천에 옮겨 보려고 하지만, 어디 그것이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고,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고 되는 일이던가!

 

심소 선생이 장수하면서 건강을 유지한 비결은 좋은 음식, 건강을 위한 운동 프로그램을 실천한 방법이 아니었다. 바로 국가와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과 항상,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지냈다는 겸손의 철학이었던 점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빙그레 웃고 계실 심소 선생의 모습이 자꾸만 그려지고 있다.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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